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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에 묶인 환자 빅데이터, 신약 개발 발목 잡는다

중앙선데이 2019.03.30 00:21 629호 12면 지면보기
원희목 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
122년 전인 1897년, 궁중 선전관으로 일하던 민병호는 궁중에서만 통용되던 생약의 비방을 궐 밖으로 보급할 고민을 한다. 민병호는 서양의학을 접목해 양약인 활명수를 만들었다. 같은 해 그의 아들 민강은 서울 순화동에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을 설립하고, 구급 위장약 활명수의 제조·판매를 시작했다. 국산 양약의 효시다. 국내 제약기업은 1999년 국산 신약 1호인 항암제 ‘선플라’를 필두로 현재까지 30개의 신약을 개발해 ‘의약주권’을 향해 달리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퀀텀 점프(Quantum Jump, 대약진) 기회로 판단한다. 웰빙(well-being)과 웰에이징(well-aging)으로 상징되는 100세 시대에 헬스바이오 산업을 국가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다. 전국 194개 기업을 회원으로 둔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원희목(65) 회장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국내 최초로 인공지능(AI) 신약개발지원센터를 설립하고, 정부에 제약·바이오를 국가 주력산업으로 선정할 것을 제안했다. 원 회장을 25일 서울 방배동 한국제약바이오협회에서 만났다.
 
원희목 회장은 ’국가 경제 성장의 강력한 대안인 제약·바이오 산업을 범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민규 기자]

원희목 회장은 ’국가 경제 성장의 강력한 대안인 제약·바이오 산업을 범정부 차원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민규 기자]

 
수출 늘었으나 내수는 20조 안팎 머물러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의 현재 상황은 어떤가. 내수와 수출 규모가 궁금하다.
“내수는 20조원 안팎에 머물러 있다. 수출은 나름대로 성장했다. 2006년 8700억원에서 10년 만에 4조6000억원으로 증가했다. 기술수출 규모도 5조원을 넘었다. 내수와 복제약(Generic) 중심으로 자족해오다 2000년대 이후 신약과 개량 신약 연구·개발에 나선 결과다. 하지만 여전히 배고프고 갈 길도 멀다.”
 
올해 제약·바이오의 좌표를 ‘국가 경제 기대주를 넘어 주력주로 만들자’는 것으로 설정했다. 의미가 남다른 것 같다.
“저출산·고령화 시대에 사회·경제적 가치가 가장 큰 산업이기 때문이다. 제약·바이오는 조선·자동차·반도체보다도 강력한 성장 엔진이다. 세계 의약품 시장 규모가 1400조원이다. 반도체(500조원)의 세 배에 가깝다. 글로벌 ‘빅 파마(Big Pharma)’인 화이자 한 곳의 매출만 50조~60조원이다. 발상을 바꿔야 한다.”
 
그렇지만 국내 제약업계의 성장은 더디다.
“동감한다. 원인이 있다. 안정적인 내수에 안주해 절박함을 덜 느꼈다. 정부는 열정이 덜했고 규제는 많이 했다. 건강보험에서 약값을 결정하다 보니 경쟁 동기 유발도 약했다. 일정 수준까지 성장하면 더 뻗어 나가지 못했다. 내수가 20조 원대에서 맴돈 이유다. 다행히 한미약품과 유한양행 등이 개발한 혁신 신약후보 물질의 성공 사례가 나오면서 블록버스터급 신약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세계적인 블록버스터급 신약의 경제성은 어느 정도인가.
“‘잘난 신약 한 알’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 애브비사는 류머티스 관절염 치료제 ‘휴미라’로 22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세계 20대 의약품의 평균 매출이 7조원이다. 신약 한 개를 개발하면 4만 명의 일자리가 생긴다. 제약사·대학·병원·임상기관·스타트업이 맞물려 돌아가는 산업이다. 국부 창출 ‘미다스 손’ 아닌가. 우리도 눈을 돌려야 한다.”
 
K 팜의 성공 가능성을 어떻게 보나.
“가능성이 충분하다. 코오롱의 퇴행성 관절염 치료제 ‘인보사’는 120년 한국 제약사의 이정표를 세웠다. 대웅제약의 미간주름개선제 ‘나보타’(미국 제품명 주보)는 올 2월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았고, SK바이오팜의 기면증 치료제 ‘수노시’는 지난 21일 FDA 시판허가를 받았다. 협회가 100개 사를 대상으로 조사해보니 선도물질부터 임상 3상까지 진행 중인 합성·바이오 신약 파이프라인(pipeline)이 573개였다. 2030년까지 개발 예정인 것을 더하면 953개다. 2025년에 글로벌 매출 1조원 신약, 2030년엔 10조 매출 제약사가 나올 수 있다. 현재 2%인 세계 시장 점유율을 5% 이상으로 높여야 한다.”
 
“너무 당찬 청사진 아니냐”고 묻자 원 회장은 “기폭제가 필요하다”고 했다. 제약 강국들처럼 정부 차원의 전략과 연구 개발(R&D) 투자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제약산업계의 R&D 투자 대비 정부 지원은 8%다. 벨기에는 40%, 미국은 37%, 일본은 19%다.
 
우리가 벤치마킹해야 할 국가가 있나.
“벨기에와 스위스다. 인구 1100만의 벨기에는 국토가 경상도 면적 크기다. 그곳에 글로벌 30위권 제약사 중 29곳이 R&D 센터나 지사를 설치했다. 글로벌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연구 메카가 된 것이다. 비결은 정부 지원과 규제 완화다. 전체 국가 R&D 예산의 40%를 투입하고, 연구 종사자들의 특허세 등을 파격적으로 80% 감면해주고 임상시험 단계를 간소화했다. 그 결과 세계 신약 R&D 파이프라인의 5%를 보유하고 있다. 벨기에는 의약품 수출액(52조원)이 총 수출액의 11%나 차지한다.”
 
원 회장이 꼽은 스위스도 벨기에 못지않다. 연간 1000개 산학협력 프로젝트에 연구비용의 50%를 대준다. 총 매출의 10% 이상을 R&D에 투자하는 기업엔 특별 지원을 해준다. 노바티스·로슈 등 톱 10 업체는 매출액의 98%를 해외에서 거둬들인다.
 
제약 바이오 협회가 지난 20일 1층에 AI 신약개발지원센터를 열었다.
“신약개발은 시간과 돈이 많이 든다. 통상 5000~1만 개의 후보물질을 탐색하고 독성 여부와 특허관계를 확인해야 한다. 거기에만 5~6년이 걸리는데, AI를 활용하면 1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 블록버스터 신약 개발에는 AI가 필수다.”
 
 
국가 주력사업 지정, 범정부 차원 지원을
 
환자 빅데이터 활용이 관건이다.
“빅데이터가 AI 활용의 생명이다. 우리는 유전자 분석이나 약 처방·투약 등 다양한 보건의료 정보가 잘 축적돼 있다. 그런데 개인정보보호법 등에 묶여 신약 개발에는 거의 쓰지 못한다. 익명성이 보장된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게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빅 데이터 보유 기관의 정보를 공익 차원에서 활용할 수 있게 규제의 커튼을 걷어내야 한다.”
 
의약품 분야는 유독 규제가 심한 것 같다.
“물론 생명을 다루는 만큼 규제는 필요하다. 줄기세포·생명윤리법·개인정보보호법 등 걸리는 게 많다. 이게 발목을 잡는다. 세상은 저만큼 앞서가는데 따라가기에도 벅차다. AI를 이용한 신약개발은 미국·일본 등에선 벌써 시작됐다. 더 늦으면 안 된다. 풀 건 풀고 묶을 건 묶는 유연성이 절실하다.”
 
원 회장은 범정부 차원의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기초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응용·개발은 산업통상자원부, 산업화는 보건복지부가 제각각 맡아 효율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경계를 허물고 범부처 차원의 전략을 짜야 한다. 의약 주권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원 회장의 제안이다.
 
양영유 헬스부문장 yangyy@joongang.co.kr
원희목 제약·바이오 산업이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국민 산업’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약사로 23년간 일했으며 대한약사회장, 제18대 한나라당 국회의원(비례대표), 사회보장정보원장 등을 역임했다. 2017년부터 제21대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을 지낸 뒤 올 2월 22대 회장으로 재선임됐다. 1954년 서울 출생, 서울대 약대, 강원대 약학 석·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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