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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지핀 성냥불꽃 끝까지 지킬 것

중앙선데이 2019.03.30 00:02 629호 13면 지면보기
[박정호의 사람풍경] 마지막 성냥공장 유엔상사 황기석 대표
김남조 시인은 ‘성냥’에서 노래했다. ‘일순간의 맞불 한번. 그 환희로 환하게 몸 (불)사루고’ 싶다고. 황기석 대표가 그어 올린 성냥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물들였다. [전민규 기자]

김남조 시인은 ‘성냥’에서 노래했다. ‘일순간의 맞불 한번. 그 환희로 환하게 몸 (불)사루고’ 싶다고. 황기석 대표가 그어 올린 성냥 불빛이 주변을 환하게 물들였다. [전민규 기자]

철컥 철컥 철컥~. 길이 8㎝의 얇은 나뭇개비가 2000여 개 작은 구멍이 뚫린 철판에 쏙쏙 박힌다. 수십 년 넘은 낡은 기계가 힘겨운 소리를 토해낸다. 충남 아산시 음봉면 유엔상사 풍경이다.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성냥공장이다. 530㎡(약 160평) 크기의 아담한 공장이다. 황기석(62) 대표의 말끝이 흔들렸다. “아마 성냥도 저와 함께 끝나지 않을까요.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40여 년 젊음을 불꽃과 함께했으니까요.”
 

하루 1000만 개비 불티났던 성냥
요즘엔 케이크용만 25만 개비 팔아

유엔성냥, 갑만 1만개쯤 남았죠
온라인서 파는 건 중국산 짝퉁

2년 전부터 팬시용품 주문 늘어
10년은 더 할 것 같지만 그 뒤엔 …

황 대표는 성냥 파수꾼이다. 마지막 성냥 지킴이다. 물론 처음부터 뜻을 세웠던 건 아니다. 가스라이터라는 천적이 등장하면서 주변 성냥공장이 하나 둘씩 문을 닫을 때마다 "무슨 수가 있겠지, 끝이 보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버텨왔다. "10년은 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뒤엔 어떻게 될까요. 배우려는 사람 하나 없는데…”
 
황 대표가 다시 기운을 차렸다. "최악은 지난 것 같아요. 2년여 전부터 수요가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자주 찾아와 팬시 용품 제작을 의뢰해요. 복고풍이라고 하나요, 향초가 인기를 끌면서 성냥 주문도 같이 살아나고 있어요. 20%가량 증가한 것 같습니다.”
 
황 대표는 경북 영주 농가 출신이다. 6남매 맏이로 10대 후반에 성냥공장에 들어갔다. "당시 영주에 공장이라곤 성냥공장과 누에고치공장 둘밖에 없었죠. 하루 200원 벌었는데 당시 쌀 한 가마니가 3000원쯤 했으니 작은 돈은 아니었죠.”
 
성냥밖에 모르고 사셨네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달리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요. 영주에서 시작해 용인·부산을 거쳐 다시 용인에 왔다가 평택을 찍고 7년 전 아산에 왔습니다. 모두 성냥공장을 따라다녔죠.”
 
공장은 어떻게 차리게 됐나요.
"1997년 다니던 유엔성냥이 부도로 문을 닫았습니다. 다른 직원 셋과 함께 여기저기 기계를 얻어다가 새로 공장을 열었어요. 뭔가 잘될 줄 알았는데 세상사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팔각 유엔성냥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금은 만들지 않아요. 중국산 유엔성냥이 온라인에서 팔리고 있는데 그건 진짜가 아니죠. 그래도 성냥갑은 1만 개쯤 남아 있어요. 옛날 생각이 난 어르신들이 가끔씩 찾으세요. 90년대 초만해도 하루 8t 트럭 한 대는 팔았죠.”
 
요즘 성냥 쓰는 사람이 있나요.
"선물·광고용 소형성냥도 뚝 끊겼죠. 제과점 케이크용 성냥만 만듭니다. 하루 25만 개비쯤 되죠. 한창 때는 이것저것 다해 1000만 개비도 나갔는데요. (웃음) 현재 직원이 6명인데, 최고로 많을 땐 400명이나 됐습니다.”
 
황기석 대표가 만든 다양한 성냥들.

황기석 대표가 만든 다양한 성냥들.

성냥은 19세기 후반 한국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인촌(燐寸)이라 불렸다. 신통방통 ‘도깨비불’이란 뜻이다. 근대문물의 상징이었다. 해방 직후에는 전국에 300여 공장이 있을 만큼 성업을 이뤘다. 부엌이든, 사랑방이든, 길거리든 성냥은 만인의 필수품이었다. 집들이 선물로 인기였고, 심심풀이 퍼즐용·수집용으도 애용됐다.
 
성냥제조가 어려운 기술은 아니죠.
"그래도 하나 완성하는 데 하루가 꼬박 걸려요. 먼저 나무에 왁스(파라핀)를 칠한 다음 미리 만들어 둔 두약(화약)을 찍고 건조시켜야 합니다. 기계 힘을 빌리기도 하지만 손품이 많이 들어가죠.”
 
성냥 하나로 꾸려갈 수 있나요.
"아닙니다. 10년 넘게 이쑤시개를 만들어 중국집에 납품했습니다. 워낙 경쟁이 치열해 그것도 그만뒀죠. 요즘엔 수박·딸기·고추 줄기를 잡아주는 나무고리(유인핀)가 효자상품입니다. 예전에 농부들이 플라스틱 제품을 썼는데 그건 일일이 수거해야하는 불편이 있었죠. 환경오염 우려도 있고요. 나무고리 관련 특허를 4종 냈습니다. 쌓인 빚도 갚게 됐고요. 궁하다 보니 다 통하는 게 있네요.”
 
성냥을 놓지 못하는 이유라면요.
"성냥만의 매력 때문이죠. 확 불타올랐을 때의 따듯함이 있잖아요. 라이터에선 느낄 수 없는 그리움이랄까요. 제가 만든 ‘도깨비불’이 그간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됐겠죠. 그러면 됐어요. 눈 감는 날까지 계속 찍어낼 겁니다.”
 
‘불의 추억’ 100년 품은 인천 배다리성냥박물관
“빈 성냥갑을 풀로 붙여서 갖다 주면 얼마씩 받아서 그걸로 반찬값을 보탰어요.” (인천시 70대 노인의 회고담) “도서출판 홍성사는 대학가 다방 등에서 광고 성냥을 무료 증정하고 있다. 소설에서는 『초대 받은 여자』, 비소설에서는 『소유나 삶이냐』를 소개했다.” (1979년 3월 한 일간지 기사)
 
최근 인천시 금곡동에 문을 연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옛 동인천우체국) 전시 내용 중 일부다. 20세기 한국인의 생활사 박물관 같다. 원래 이곳엔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인 조선인촌주식회사(1917년 10월 4일 설립)가 있었다. ‘성냥의 메카’ 인천을 알렸다. 이후 전국에 성냥공장이 잇따라 들어섰다. 이번 박물관에는 각양각색 성냥은 물론 부싯돌·석유풍로 등 추억의 물품 200여 점이 모였다. 황기석 유엔상사 대표가 내놓은 자료도 전시돼 있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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