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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선화공주 로맨스의 결실…미륵사지 석탑, 부처 참뜻 전하길

중앙선데이 2019.03.30 00:02 629호 19면 지면보기
[이훈범의 문명기행] 1400년 만에 복원된 국보 11호
20년 공사 끝에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복원 형태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더니 이제 복원 방법을 놓고 다툼이다. 논쟁은 좋으나 그 사이 중생을 구제하려는 부처의 큰 뜻이 담긴 탑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박종근 기자]

20년 공사 끝에 복원된 미륵사지 석탑. 복원 형태를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더니 이제 복원 방법을 놓고 다툼이다. 논쟁은 좋으나 그 사이 중생을 구제하려는 부처의 큰 뜻이 담긴 탑의 의미가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박종근 기자]

팔자 참 기구하다. 대한민국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 말이다. 귀한 존재로 태어났으나 여러 차례 험한 꼴을 당하고 이제야 제대로 치료를 받았나 싶었더니 수술 방법을 놓고 맞다 틀리다 말들이 많다. 탑이란 본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드는 건조물이다. 중생을 구제하려는 부처의 뜻을 담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제 그 뜻은 사라지고 아름다움이나 견고함, 경제성만 따지게 됐으니 이런 불탑이 천 년을 간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다. 탑에 전문지식도 없으면서 논란을 보태고 싶지는 않다. 다만 우여곡절 끝에 복원된 이 탑이 지난 1400년의 험한 일을 더 이상 당하지 않고 무탈하게 서서 조금이나마 사람들에게 불심의 참뜻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동서 172m, 남북 148m 미륵사지
‘연못 매립’ 삼국유사 기록은 사실
복원 방법 둘러싼 무성한 논란 유감

봉안기엔 ‘무왕의 비는 사택왕후’
미륵사지 창건은 선화공주가 하고
서탑은 사택왕후가 보탰을 수도

 
진실의 순간 오기 전엔 상상의 영역으로
 
조선 후기 붕괴 된 미륵사지 서탑.

조선 후기 붕괴 된 미륵사지 서탑.

전북 익산시 금마면 미륵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았던 미륵사는 서동과 선화공주 두 사람의 국경을 초월한 러브스토리의 결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가 그것을 전한다.
 
“하루는 (백제) 무왕이 부인(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을 때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彌勒三尊)이 출현함으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반드시 여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진실로 제 소원입니다.’ 왕은 그것을 허락하고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다. 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 삼존의 불상을 만들고 법당과 탑, 낭무(廊廡·법당 아래 동서로 붙여 짓는 건물)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신라) 진평왕이 여러 공인을 보내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있다.” (『삼국유사』 2권 ‘무왕’)
 
일연은 미륵사를 본 적이 있었겠지만,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된 1980년에 미륵사 터에 남아있던 것은 국보 11호 서탑(西塔)뿐이었다. 그런데 완전히 무너진 동탑 주변을 조사해보니 연못을 2.5m 높이로 메운 사실이 드러났다. 신통력이었든 대규모 매립공사였든 일연의 설화가 전혀 엉터리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탑을 세울 부분은 탑의 너비보다 1m 가량 넓게 흙을 되팠다. 그 자리에 큰 돌과 왕모래, 자갈을 차례대로 26단이나 쌓아 다지고 다시 초석을 놓은 뒤 탑을 쌓았던 것이다.
 
그런데 서탑을 복원하기 위해 2009년 탑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탑의 초석 밑에서 사리장엄구(사리를 넣은 용기)와 함께 발견된 금판 봉안기의 기록에서 탑을 만든 주체인 무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 선인(善因)을 심었기에 지금 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의 동량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일제가 시멘트로 땜질해 복원한 서탑의 모습. [연합뉴스]

일제가 시멘트로 땜질해 복원한 서탑의 모습. [연합뉴스]

무왕의 비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의 딸이었던 것이다. 이에 성급한 사람들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꾸며낸 것으로 단정지으려 하지만 꼭 그럴 것만도 아니다. 무왕이 등극한 해가 600년이고, 석탑이 세워진 해가 639년이다. 게다가 무왕은 왕이 되기 전 ‘마를 캐는 아이’라는 뜻의 서동이라 불릴 때 선화공주를 만났다. 40년도 더 된 일이니, 그 사이 선화공주가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고, 무왕이 새로운 비를 맞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시는 후궁 아닌 정비(正妃)를 여러 명 두기도 하던 시기였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고려 태조 왕건은 정비만 6명이었다. 창건은 선화공주가 하고 사택왕후는 탑을 더했을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무왕 자체가 신비의 인물이다. 일연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태우 정부 때 9층으로 복원한 미륵사지 동탑.

노태우 정부 때 9층으로 복원한 미륵사지 동탑.

“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수도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고 아들을 낳았다. 어려서의 이름은 서동(薯童)이다. 서동은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마를 캐서 팔아 생활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으로 이름을 삼았다.”
 
하지만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무왕을 법왕(法王)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법왕이 즉위한 이듬해 죽자 아들로서 왕위를 이었다.”
 
설화적 요소가 많은 『삼국유사』보다는 『삼국사기』 내용이 더 사실적이긴 하다. 무왕 시대에 백제와 신라가 치열하게 맞붙었던 점을 감안해도 다른 나라 간 결혼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봉안기처럼 언제 어디서 선화공주의 존재를 입증할 사료가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나. 진실의 순간이 오기 전에는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우리네 역사와 문명사 속에 선화공주 하나 남겨둔다고 해서 문제될 게 있느냐는 말이다.
 
미륵사지 석탑도 그렇다. 미륵사지는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로 국내 최대의 절터고, 국보인 탑은 현존하는 최대 최고(最古)의 석탑이다. 발굴조사 결과 ‘1금당 1탑’이 일반적인 백제 양식과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유행한 ‘1금당 2탑’과는 달리 ‘3금당 3탑’이라는 독특한 양식이다.
 
 
유홍준 “동탑 폭파하고 싶다는 사람 있어”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런 미륵사가 언제 무슨 이유로 폐사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석탑의 높이가 여러 장(丈)이나 돼 동방의 석탑 중 가장 큰 것”으로 기록돼있는 걸 보면 조선 중기까지는 존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조 때 문인 강후진의 『와유록(臥遊錄)』을 보면 조선 후기에는 이미 폐허가 됐음을 알 수 있다.
 
“밭둑 사이에 7층 석탑이 있는데, 촌로가 탑에 올라 비스듬히 누운 채 곰방대를 물고 있다. 탑은 100년 전 벼락으로 절반이 허물어졌고, (…) 여기저기 초석과 석조가 널려있는데 대단히 높고 크며 (…) 동방 석탑 중 제일이란 말이 거짓이 아니다.”
 
1993년 노태우 정부는 “고증이 불가하다”는 학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탑을 9층으로 복원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고 한 그 탑이다. 국보인 서탑과 마주 보고 있는데 돌을 정으로 쪼아 다듬는 옛 방식이 아니라 현대식 기계로 매끈하게 깎은 화강암을 쌓아 마치 레고로 만든 탑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어쩌랴. 그것 역시 우리의 역사요, 우리의 문명수준이었던 것을. 반면교사를 위해서라도 그냥 놔두는 것이 괜찮을 성싶기도 하다. 적어도 완벽한 고증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동탑 지붕돌 모서리마다 매달린 풍경들이 내는 소리는 오히려 은은했다. “그것이 내 잘못이냐”고 소곤대는 것처럼.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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