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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천재라서 요절할 수도" 어느 시인의 아픈 예언

중앙일보 2019.03.29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17)
쇼팽이 파리에 와서 몇 개월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쇼팽과 리스트와의 식사 자리에 음악계에 발이 넓었던 페르디난트 힐러가 첼리스트 오귀스트 프랑숌(Auguste Franchomme, 1808~1884)을 데려왔다. 쇼팽은 첫눈에 그가 마음에 들었고 식사 후 자신의 아파트로 그를 초대하였다. 쇼팽과 프랑숌은 이것으로 평생 친구가 되었다. 한때 그는 거의 매일 쇼팽을 찾아왔다. 쇼팽을 마지막까지 옆에서 지켜준 사람도 그였다.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로 파리 음악원에서 교수로도 일했던 프랑숌은 쇼팽에게 첼로에 대한 영감을 불어 넣어 만년의 첼로소나타를 포함해서 첼로를 위한 곡을 몇 개 쓰도록 만들었다. 대부분 피아노곡인 쇼팽의 작품에 다른 악기가 들어가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첼로를 위한 곡이 있는 것은 프랑숌의 기여가 크다.
 
쇼팽은 프랑숌의 시골집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때 프랑숌의 어머니에게 받은 친절을 잊지 못했다. 그는 음악에 대한 기여로 프랑스 최고의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는데 수상 후 4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오귀스트 프랑숌. 장 마소(Jean Massaud)의 연필화.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오귀스트 프랑숌. 장 마소(Jean Massaud)의 연필화.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프랑숌은 두 대의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1711년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가 제작한 것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사들이는데 1843년 당시 기록적인 2만 5000프랑을 지불했다. 그 돈은 요즘 가치로 약 5억원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그 첼로의 소유권은 20세기 최고의 첼리스트라고 불렸던 로스트로포비치의 상속인에게 있다. 그 첼로는 요즘 부르는 게 값이다.
 
쇼팽이 좋아했던 작곡가로 빈첸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도 있다. 신진 오페라 작곡가였던 그는 이탈리아와 영국을 거쳐 잠깐 머물 계획으로 1833년 파리에 왔다. 그의 말은 시칠리 섬 사투리가 심해 이탈리아 출신도 잘 알아듣지 못했고 프랑스어는 엉망이었다. 이미 ‘노르마’와 ‘몽유병 여인’ 등 좋은 오페라를 작곡하였지만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파리에서 3대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인 이탈리앙 극장(ThéâtreItalien)과 계약을 맺고 눌러앉아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는 최고를 꿈꾸고 있었다. 이탈리앙 극장의 보수는 이 전에 있던 다른 곳보다는 좋았지만 넉넉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는 어려워하고 있었다. 쇼팽은 여러 살롱에 데리고 다니며 그를 알려서 파리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힘썼다. 쇼팽은 벨리니의 벨칸토 스타일의 음악을 좋아해서 그의 오페라를 볼 때 눈물을 흘릴 정도로 몰입하기도 했다. 쇼팽의 녹턴에는 벨칸토 스타일의 성악적 요소가 세련된 모습으로 풍부하고 들어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1835년 1월, 그는 새로운 오페라 ‘청교도’를 무대에 올렸다. 청중은 열광했고 그는 원했던 대성공을 이루었다. 공연은 시즌이 끝나는 3월 말까지 17차례나 계속되었다. 성공한 그에게 루이 필리프 왕은 프랑스 최고 훈장을 수여했고 나폴리의 왕도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청교도' 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그는 한 살롱에서 독일 출신의 낭만파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를 만났다.
 
하이네는 그에게 “당신은 천재이다. 그러나 천재이기 때문에 라파엘이나 모차르트처럼 일찍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라고 했다. 벨리니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느 날 한 명사가 둘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두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러나 당일 저녁 그는 몸이 불편해서 참석할 수 없다는 급한 전갈을 보내왔다. 그는 설사와 발작으로 이어지는 심한 복통을 며칠간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데 그의 나이는 34살이었고 최고의 성공을 이룬 바로 그 해였다.
 
빈첸초 벨리니. International Museum and Library of Music, 볼로냐 이탈리아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빈첸초 벨리니. International Museum and Library of Music, 볼로냐 이탈리아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쇼팽과 동년배이며 독일의 낭만파 음악의 대표적 작곡가인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도 빼놓을 수 없는데 그는 폴란드 밖에서 쇼팽의 천재성을 알아본 최초의 음악가였다. 그는 글 쓰는데 재주가 있어서 음악 평론으로 먼저 유명해졌다. 쇼팽의 작품 중 두 번째로 출판된 ‘모차르트 주제에 의한 변주곡’의 악보를 받아보고 음악신문 (AllgemeineMusikalische Zeitung)에 그가 쓴 ‘모자를 벗으세요. 천재가 나타났소’라는 제목의 평론은 유명하다.
 
어릴 적부터 음악과 문학에 재능을 보였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는 그에게 법학 공부를 강요했다. 하는 수 없이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다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리치지 못하고 유명한 비크(Wiek) 교수 아래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음악은 일찍 시작해야 성공할 수 있다. 특히 피아노 등의 악기는 어린 나이에 시작하지 않으면 기교를 익히기가 어렵다. 슈만은 늦은 시작을 만회하려 기계를 이용해서 무리하게 손가락 훈련을 하다가 손가락을 다치고 작곡으로 돌아섰다.
 
당시 비크 교수에게는 애지중지하던 어린 딸이 있었는데 피아노에 재능이 뛰어났던 클라라(1819~1896)였다. 슈만이 어린 클라라에게 관심을 보이자 비크 교수는 크게 화를 냈다. 둘은 7년간에 걸친 법정 싸움을 벌였고 결국 슈만은 9살 아래의 클라라와 결혼에 성공하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여류 피아니스트 중 하나로 꼽혔던 클라라는 그의 음악 동반자로 그의 음악 활동에 큰 힘이 되었다.
 
로베르트 슈만. 폴란드 밖에서 쇼팽의 천재성을 알아본 최초의 음악가였다. 요제프 크리후버(Josef Kriehuber)의 석판화.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로베르트 슈만. 폴란드 밖에서 쇼팽의 천재성을 알아본 최초의 음악가였다. 요제프 크리후버(Josef Kriehuber)의 석판화.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슈만은 쇼팽의 많은 작품에 대해 음악 신문에 평론을 올렸고 그의 글은 영향력이 있었다. 그는 쇼팽이 그 시대의 ‘가장 대담하고 자랑스러운 시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하였다. 슈만은 쇼팽의 음악이 갖는 폴란드 민족적 의미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제대로 이해했다. 한 평론에서는 쇼팽의 마주르카가 대포보다도 러시아에 더 위협적이라고 썼다. 쇼팽의 마주르카가 담고 있는 폴란드 민족 정서를 제대로 본 것이다.
 
쇼팽은 1835년과 1836년 독일을 방문했다. 슈만과 클라라, 비크 교수 그리고 라이프치히의 음악계 인사가 쇼팽을 얼마나 고대했고, 만났을 때 얼마나 감격했는지는 신문기사 등을 통해 남아있다. 그는 멘델스존, 힐러, 리스트하고도 친했다. 아들 중 하나는 펠릭스였는데 그 이름은 멘델스존의 이름에서 따왔다. 둘은 서로의 아들에게 상대의 이름을 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멘델스존에게는 로베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가 없다.
 
쇼팽은 그의 4곡의 발라드 중 2번째 작품을 슈만에게 헌정하였다. 쇼팽의 발라드는 모두 시(詩)에서 영감을 받은 곡이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연주에 5분 안쪽이 걸리는 짧은 곡인데 반해 발라드는 피아노 독주곡이면서도 8~10분가량 걸려서 대작처럼 느껴진다. 4곡의 발라드 중 첫 번째 곡이 가장 자주 연주된다.
 
클라라 슈만. 결혼하기 직전의 모습. 클라라는 당대 최고의 여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었다. 요한 하인리히 슈람(Johann Heirich Schramm)의 1840년 그림.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클라라 슈만. 결혼하기 직전의 모습. 클라라는 당대 최고의 여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이었다. 요한 하인리히 슈람(Johann Heirich Schramm)의 1840년 그림.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말년의 슈만은 심한 조울증을 동반한 정신병으로 고생했다. 작곡한 곡에도 정신병의 징후가 나타났다. 그는 아내 클라라를 불러 정신착란에 빠진 자신이 해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했다. 아내와 아이들은 번갈아 가며 밤낮 그를 감시했다. 어느 날 몰래 집을 빠져나온 그는 근처 라인 강의 다리 난간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결혼반지를 강물에 던지고 자신도 강으로 뛰어들었는데 다리 관리인이 가까스로 그를 구조하였다. 그 후 그는 자원해서 정신병원에 들어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은 청년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를 음악계에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 남겨진 가족을 당시 23살이었던 브람스가 돌보아주었는데, 독신으로 평생을 보낸 브람스는 클라라와 친구 이상 부부 이하의 관계를 죽을 때까지 유지했다. 1896년 14살 연상의 클라라가 세상을 떠나자 브람스는 크게 상심했고 이듬해 그도 세상을 떠났다.
 
쇼팽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와 슈만은 모두 21살이었고 리스트와 힐러가 20살, 멘델스존은 22살, 프랑숌이 23살, 베를리오즈와 벨리니는 각각 28살, 30살이었다. 후세에 각자의 이름을 분명히 남긴 저명한 음악가들이 이처럼 무더기로 같이 어울리고 교감했던 시대는 전무후무할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쇼팽과 친구들의 재미있는 일화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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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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