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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정치 포커스] 문재인 대통령 연설문 팩트체크

중앙일보 2019.03.29 10:00
정책 명분 다지려 공식 발언에 과장된 정치적 수사 빈발
실적 보여주기 조급함 버리고 객관적 진단과 처방 모색해봐야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9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며 물을 마시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9년도 예산안에 대한 시정연설을 하며 물을 마시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우리는 부의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한 나라가 됐습니다.”
 
1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의 한 대목이다. 이 발언은 ‘경제적 불평등’, ‘가장 극심한 나라’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 말은 사실일까. 우리나라의 구조적 불평등 문제를 강조하기 위한 취지겠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대통령의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소득 분배의 불평등 정도를 보여주는 대표적 지표는 지니계수다. 0에서 1 사이의 값이 커질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2017년 우리나라의 지니계수는 0.355였다. OECD 35개국 중 31위다. 우리나라보다 양극화가 심한 나라에는 미국·터키·칠레·멕시코가 있었다. 부의 불평등이 심한 편에 속하긴 하지만 ‘가장 극심한’ 나라는 아니다. 대통령의 수사가 현실을 지나치게 과장한 것이다.
  
이처럼 대통령의 공식 발언과 연설들이 팩트에 어긋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정부 정책의 정당성을 강조하려다 보니 관계되는 현실을 극단적 상황으로 보이게 끔 말로 치장하는 것이다. 일부는 정치적 수사의 차원을 넘어 왜곡에 이르거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맞다, 틀리다를 놓고 논쟁이 벌어질 정도로 모호한 경우도 있다.
 
대통령이 현실을 정확히 모르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참모들이 객관적인 상황을 숨기고 대통령이 원하는 방향으로 팩트를 끼워 맞추거나 왜곡 해석한다는 비판이다. “대통령의 상황 인식이 현실과 괴리되기 시작하면 정책의 결과는 목표와 매우 큰 오차가 벌어진다. 우주로 쏘아 올리는 로켓의 각도가 아주 미세하게 틀어져도 도착점에선 매우 큰 오차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참사가 빚어지지 않도록 하려면 참모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레토릭과 왜곡의 경계에 선 대통령의 연설문
1월 10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청와대 비서진이 대통령의 연설을 지켜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월 10일 청와대 본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에서 청와대 비서진이 대통령의 연설을 지켜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문 대통령의 올해 신년기자회견은 경제 부문에 관한 언급이 많았다.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좀처럼 해소되지 않는 것을 의식한 듯 정부의 정책 기조에 대한 당위성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국내 경제 상황을 진단하고 처방이 필요하다는 설명들이다.
 
사실관계는 맞지만 자세히 들어가 보면 어두운 면을 빼고 낙관적인 면만 부각한 내용도 많았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2018년) 우리는 사상 최초로 수출 6000억 달러를 달성했다”고 했다. 그 자체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질적 성장으로 따져보면 성과에 만족할 때가 아니란 게 금세 드러난다. 지난해의 수출 호조세는 반도체가 주도했다. 하지만 연말로 갈수록 반도체 경기가 둔화하면서 지난해 11월 경상수지 흑자폭은 7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전반적인 가계 실질소득을 늘리고 의료·보육·통신 등 필수 생계비를 줄일 수 있었다”는 말도 액면 그대로는 소득이 올랐다는 성과지만 실상은 큰 문제를 안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전체 가구의 실질소득은 2017년 4분기 이후 증가했다. 하지만 실질소득 증가가 고소득층에게 집중되면서 소득격차가 더 커졌다. 저소득층인 1분위(소득 하위 20%) 소득은 오히려 7% 감소했고, 고소득층인 5분위(소득 상위 20%)는 8.8% 늘었다. 이 때문에 소득 격차를 나타내는 ‘균등화 처분가능소득의 5분위 배율’은 5.52배로 11년 만에 가장 커졌다. 필수 생계비가 줄어 상대 소득이 늘었다는 것도 과장에 가깝다. 지난해 3분기 가구당 월평균 처분가능소득은 1년 전보다 9400원 늘었을 뿐이다. 이는 2009년 이후 9년만에 가장 작은 증가폭이다.
  
“상용직 일자리가 증가하고, 고용보험 가입자가 대폭 늘었으며, 청년 고용률은 사상 최고일 정도로 개선되고 있다”는 말에도 상황 인식의 오류가 엿보인다. 지표상으로는 개선된 것처럼 보이지만 뜯어보면 ‘개선됐다’는 말이 오히려 민망한 수준이다. 지난해 상용직 근로자는 전년보다 34만5000명 늘었다. 하지만 2016년(34만6000명)과 2017년(36만6000명)에 비교하면 둔화된 흐름이다. 지난해 늘어난 취업자 수는 9만7000명에 불과해 금융위기 수준에 근접했다. 취약계층의 일자리인 임시·일용직은 1년 만에 19만5000개가 사라졌다. 분배 정의를 실현하겠다는 정부 정책이 오히려 부의 편중을 심화시키고 저소득층을 위협하는 역효과를 걱정해야 할 정도다.
  
대통령의 상황 인식과 평가는 곧바로 정부 정책의 기조로 반영된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올 2월 취업자 수가 1년 전보다 26만여 명 늘어나 13개월 만에 최대폭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자 기획재정부는 “상용직 증가 추세, 청년고용 개선 등 고용의 질 개선 흐름이 지속하고 있다”고 평했다. 문 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에서 밝힌 평가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정말 그럴까? 기재부의 이런 긍정적 평가와 달리 고용의 질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2월달 취업자가 늘어난 것은 맞다. 그런데 60세 이상이 39만7000명이나 늘었다. 30대와 40대는 오히려 각각 11만5000명, 12만8000명 줄었다. 정동욱 통계청 고용통계과장은 “노인 일자리사업에 지원한 분들이 보건·복지공공·행정 등 분야에 취업자로 유입된 게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정부가 재정을 풀어 ‘노인 단기 알바’ 일자리만 만들어 취업자 수가 늘어난 듯한 착시효과를 준 것이다. 실업자 수도 130만3000명으로 1년 전보다 3만8000명 늘었다. 대부분의 경제 전문가들은 고용의 질이 개선됐다는 정부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생활경제 분석을 주로 하는 서울시 중구에 있는 한 민간경제연구소의 소장(경제학 박사)은 “심각한 고용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정부가 ‘개선되고 있다’고 자평하는 건 대통령의 공식 발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서다. 만약 기재부가 ‘고용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린다면 문 대통령의 신년 연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의 발언들에는 유독 ‘가장’, ‘최고’ 등 최상급 수식어가 많이 눈에 띈다. 지난해 9월 미국 언론 폭스(FOX)뉴스와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은 “한국의 역사상 지금처럼 언론의 자유가 구가되는 시기는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여기서도 ‘역사상’이란 단어를 써서 최고의 언론자유를 강조한다.
 
 
‘역사상 이런 정부는 없었다’(?) 지나친 강조 남발
문 대통령의 신년 연설에서 언급된 주요 키워드

문 대통령의 신년 연설에서 언급된 주요 키워드

 
하지만 한국의 역사상 언론의 자유가 지금보다 높았던 시기는 ‘있었다’. 지난해 4월 국경없는기자회가 발표한 ‘2018 세계 언론자유지수(PFI)’에 따르면 한국은 조사대상 180개 국가 중 43위였다. 2017년보다 20계단 상승해 언론 자유지수가 크게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역사상 가장 높은 순위는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6년 31위로 역사상 가장 높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에도 언론 자유도는 지금보다 높았다.
 
이처럼 팩트에 기반하지 않은 자화자찬식 발언은 대통령뿐만 아니라 참모들과 여당 지도부의 발언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지난 2월 6일 더불어민주당 제2사무부총장인 소병훈 의원은 설 민심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경제가 ‘폭망했다’고 말하는 시민에게 OECD 중 2.7% 이상 성장률을 기록한 나라가 몇 곳쯤 되는 것 같으냐고 물어보면 말씀을 안 한다. 미국을 제외하고 대한민국이 성장률 1위라는 말씀을 드렸다”고 말했다.
  
정확한 근거로 막연한 불안감을 해소시킨 듯 말했지만, 소 의원의 발언은 사실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OECD가 발표한 각국 성장률 전망치에 따르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는 2.7%가 맞지만 이는 36개국 중 21위에 불과한 수준이다. 가장 높은 곳은 아일랜드로 5.9%에 달했다. 폴란드가 5.2%로 뒤를 이었고 이스라엘 3.6%, 호주 3.1%, 룩셈부르크 3.0% 등이었다.
 
이 역시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안심할 게 아니라 위기감을 가져야 하는 수치다. OECD에 가입한 1996년 당시 우리나라의 성장률은 7.6%로 회원국들 중 두 번째로 높았다. 2002년에는 7.4%로 1위를 차지한 적도 있다. 하지만 2015년에 15위로 미끄러지고 2016~2017년에 11위와 13위로 약간 회복하는가 싶더니 지난해에는 2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대통령의 참모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상황을 인용했다가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다. 조국 민정수석은 지난해 11월 29일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용훈 수원교구장을 찾아가 사과했다. 앞서 낙태죄 폐지 국민 청원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본의와 다르게 인용했다가 천주교 측의 비판을 받은 데 대한 공식 사과였다.
 
조 수석은 11월 26일 국민청원에 답변하면서 “근래 프란치스코 교황이 임신중절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며 “이번 청원을 계기로 우리 사회도 새로운 균형점을 찾았으면 좋겠다. 임신중절 실태조사 재개와 헌법재판소 위헌심판 과정에서 사회적·법적 논의가 이뤄질 전망이며, 입법부에서도 함께 고민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 수석의 말의 맥락은 낙태 금지에 대한 재논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교황의 발언이 마치 그런 입장과 일치한다는 듯 인용한 것이다.
  
천주교 측은 즉시 조 수석이 교황의 발언을 왜곡했다고 반발했다. 다음날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는 보도자료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청와대의 발표처럼 인공 임신중절에 대해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며 “마치 교황이 낙태에 관한 가톨릭교회의 기본입장 변화를 시사하고 있는 것처럼 발표해 국민에게 마치 천주교가 낙태죄 폐지와 관련해 긍정적으로 논의할 수도 있으리라는 착각을 갖게끔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2017년 11월 29일 천주교 수원교구를 찾아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를 예방하고 있다. 조 수석은 낙태죄 폐지 관련 국민청원 답변 과정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천주교의 반발을 샀다. / 사진:연합뉴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2017년 11월 29일 천주교 수원교구를 찾아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 위원장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를 예방하고 있다. 조 수석은 낙태죄 폐지 관련 국민청원 답변 과정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천주교의 반발을 샀다. / 사진:연합뉴스

 
참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전략적 모호성’
지난해 10월 20일 벨기에 브뤼셀 유럽연합이사회본부 내 대기실에서 문 대통령이 연설문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20일 벨기에 브뤼셀 유럽연합이사회본부 내 대기실에서 문 대통령이 연설문을 검토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31일 민주당 지도부 초청 오찬에서 문 대통령은 “‘경제 실패’ 프레임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며 언론에 책임을 돌렸다. 문 대통령은 “예를 들어 올해(2018년) 소비는 지표상 좋게 나타났다. 하지만 (언론에서) 소비심리 지수의 지속적 악화를 얘기하며 소비가 계속 안 되는 것처럼 일관되게 보도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소비가 상당히 견조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 국민들에게 사실 그대로 전달되지 못했다”고 했다.
 
소비가 ‘견조하다’는 인식은 당시 경제 상황에 비춰볼 때 맞다고 보기 어렵다. 통계청의 소매판매액 지수 증가율을 보면 지난해 7~8월에는 5%대를 유지하다가 9월에 0.5%로 제동이 걸렸다. 추석이 끼어있는 10월에 다시 5.1%로 반등했지만 11월에 다시 1.0%로 떨어졌다. 한국은행이 집계하는 민간소비 증가율도 1분기에는 3.5%에서 2분기 2.8%, 3분기 2.5%로 떨어졌다.
  
당시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최근의 내수 경기는 호황과 거리가 멀다. 그런 상황에서 지표가 높게 나왔다면 고소득층 소비만 늘어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인지 분석부터 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 교수의 지적대로 올 연초에 나온 통계에서 고소득층의 실질소득은 크게 늘고 저소득층은 오히려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지만 전체 평균 수치만 놓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청와대의 인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처럼 청와대와 문 대통령의 발언들은 완전히 거짓으로 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정상적인 평가로 보기도 어려운 모호함 속에서 논쟁을 양산하고 있다. 일부에선 이를 ‘전략적 모호성’으로 보기도 한다. 전략적 모호성이란 개념은 박근혜 정부 때 나왔다.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인한 중국의 보복 등 갈등이 고조됐을 때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일방의 편을 들기 어려운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전략적 모호성’을 택함으로써 미국과 중국 모두와 관계를 유지하는 편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었다.
 
정부 의도대로 국가적 관계 파탄은 면했다. 하지만 민간의 손실이 상당했다. 정부가 전략적 모호성의 효과를 누리는 동안 중국 진출 기업들은 ‘불확실성의 늪’에 빠져 벗어나지 못했다. 라정주 파이터치연구원장(경제학 박사)은 “정부의 레토릭이 명료하지 않을 때 불확실성의 늪은 우리 사회를 잠식한다”면서 “정부로선 정책의 정당성과 명분을 다지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나, 실질적인 영향을 받는 민간 부문과 국민이 체감하는 상황과 괴리가 커질 경우 오히려 정부 정책의 동력이 한순간에 상실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말에 오차 생기면 정부 믿음 깨져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숨김없이 알려야 한다고 참모들에게 강조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숨김없이 알려야 한다고 참모들에게 강조했다.

대통령의 연설과 관련한 잡음과 팩트 논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뭘까. 보수 정부의 청와대에서 연설문 작성에 관여한 한 인사는 “구조적으로 실무 부처에서 청와대에 올리는 자료는 비교적 객관적”이라며 “문 대통령의 연설문은 청와대 수석실을 거쳐 대통령 연설문으로 다듬어지면서 과도하게 ‘초’를 치는 상황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연설문”이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나아가 “역대 대통령 연설문 중 정확도와 객관성 면에서 아마도 문 대통령의 연설문이 가장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면서 대통령 주변의 사람들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대통령의 연설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이렇다. 행사나 기념일의 연설문이나 축사는 주무 부처에서 초고를 작성한다. 이를 청와대 해당 수석실에서 취합 검토한 뒤 연설비서관(국민소통수석실)에게 전달한다. 여러 단계를 거치다 보면 초고의 내용은 사라지고 대통령과 참모들의 생각이 문장에 녹아든다.
 
이 과정에서 참모들이 과도하게 치적을 평가하거나 위기를 축소하는 식의 ‘마사지’가 이뤄지기도 한다. 참여정부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연설문을 작성했던 강원국 전 연설 비서관은 과거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노 전 대통령이 윤태영 대변인을 질책한 일화를 들려줬다. 윤 대변인이 ‘보안상의 문제’로 정책 내용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을 두고 노 전 대통령은 “국민이 주인인데 왜 국민한테 안 알려주고 너네끼리만 정보를 알고 있느냐”고 했다는 것이다. 강 전 대변인은 “가능하면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게 노 대통령의 지론이었다”고 회상했다.
 
김대중(DJ)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원로 인사 A씨는 “대통령은 말로써 국정의 방향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설득한다”면서 “그만큼 대통령의 말에는 오차가 없어야 한다. 오차가 생기는 순간 정부 정책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사라진다”고 말했다. 그는 “재정 투입이나 조기 집행과 같은 단기 처방으로 일자리가 늘고 살기 좋아졌다고 국민을 속이는 것은 착시효과로 잠시 현실을 가릴 순 있어도 근본 대책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A씨는 DJ정부에서 정책이 입안되고 실행되는 전반을 조망하는 자리를 경험했다. 다만 현 정부와 인연 때문에 실명 공개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는 “정부가 이전 정권과 차별화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큰 것 같다”고 진단했다. “현 정부가 태생적인 특수성 때문에 자꾸 눈에 보이는 실적으로 정당성을 얻으려 한다”는 게 그가 갖는 문제의식이다. 풀어보면 이렇다.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부의 실정(失政)에 의해 탄생했다. 문 대통령이 말하듯이 촛불을 든 시민들의 ‘혁명적’ 궐기로 정권이 교체됐다(문 대통령은 이를 ‘촛불혁명’, ‘촛불정권’이라고 칭했다). 정상적인 절차에 의한 정권 이양이 아니었다는 의미다. 그러다보니 전 정권과 차별화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이 상당했다는 거다. 그렇게 표출된 게 거의 모든 정부 기관에서 벌어진 적폐 청산과 개혁 드라이브, 정권 교체의 주요 공신인 개혁세력에 대한 정치적 보상과 정책 연대, 촛불 시민들에 대한 보상 성격의 이익 분배로 나타났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박근혜 정부의 폐해가 다시 등장?
지난해 10월 19일 벨기에 브뤼셀 유러피언빌딩에서 열린 제12차 아셈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연설문을 검토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10월 19일 벨기에 브뤼셀 유러피언빌딩에서 열린 제12차 아셈정상회의에서 문 대통령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연설문을 검토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실제로 문 정부가 들어선 뒤 시민사회진영과 개혁세력은 대거 주류로 편입됐다. 조국 민정수석, 박상기 법무부장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등 참여연대·경실련 등의 시민사회진영이 권력의 전면에 배치됐다. 사법부에선 우리법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법관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DJ정부에서 민정수석을 지냈던 김성재 한신대학교 교수(김대중아카데미 원장)의 진단도 크게 다르지 않다. 김 교수는 지난해 12월 [중앙선데이]와 인터뷰에서 “민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책 할 때 (중요한 건) 어떤 입장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듣느냐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청와대 안에 있는 사람들이 심지어 ‘정말 그렇게 심각한가’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청와대의 상황 판단이 현실과 동떨어져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국민이 얼마나 한숨 쉬고 아파하는지가 (청와대에) 안 들리니 안타깝다. 그걸 들을 수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었는데 청와대 들어가서 못 들으면 안 된다”고도 했다.
 
원로들의 지적은 결국 대통령의 말과 현실 인식의 일치가 중요하다는 데서 만난다. 그 일치를 만들어내는 건 대통령이 주변의 참모들이다. 이어지는 김 교수의 말은 바로 국정은 대통령 혼자 이끌어가는 게 아니란 점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청와대에 있는 사람들이 선한 동지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은 동지, 나머진 적으로 규정한다. 비판에 몰리다 보면 반작용으로 점점 더 그걸 강화시킨다. 행정부는 장관·국무회의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건데 국무회의 기능은 없어지고 청와대 수석회의만 있다.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가졌던 폐해가 또 다른 의미에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A씨의 진단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2, 3년 뒤의 선거, 5년 뒤의 정권 재창출에 목표를 둔 정책은 국민을 설득하지 못한다. 당장 지표가 좋지 않다고 해도 정책이 정당했다면 국민은 참고 기다려준다”고 강조했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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