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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겪는 그 고통 나도 알아" 이런 말은 하지 마세요

중앙일보 2019.03.28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31)
그림자.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림자.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림자
어쩌다 홀로 앉거나 걷다가도
순식간에 꿈속 가위눌려 붙잡는 것
인기척에 뒤 돌아보고는
먹물처럼 소스라친다
 
모든 걸 기억하며 그리는 몸의 목격자
혼자인 걸 두려워할까
빛의 춤사위 율동을 어디든 남긴다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것들
채울 수도 비울 수도 없어 아쉬움인
내가, 내가 되지 못하고
남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숨 쉬는 나를
 
훌훌 벗어버린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니
그가 날 사랑하는 방법이다
 
[해설]
우리는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고자 노력한다. 사랑은 궁금하고 모르는 게 많을수록 더 오래 가고 깊어지나 보다. 서울 한강공원 반포지구에서 한 연인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뉴스1]

우리는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고자 노력한다. 사랑은 궁금하고 모르는 게 많을수록 더 오래 가고 깊어지나 보다. 서울 한강공원 반포지구에서 한 연인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 [뉴스1]

 
우리는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고자 노력한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며, 가족관계는 어떤지. 한가할 때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취미는 혹시 나와 같을지 다를지. 어떤 음식을 싫어하며 또 즐겨 먹는지. 모든 게 궁금해진다. 그러곤 바짝 마른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아무 저항 없이 상대방의 현재 모습을 받아들이려고 하고, 또 마음을 연다. 그러니 사랑은 궁금하고 모르는 게 많을수록 더 오래 가고 깊어지나 보다.
 
시간이 가고 사랑하면 할수록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게 많아진다. 그러나 다 안다고 오해하는 순간 사랑이 변질되기 시작한다.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해버리면 더는 상대를 쳐다볼 필요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심하면 상대를 자유롭게 놔두지 못하고 소유하고 구속하려고 들게 된다. 또 가르치려 든다. 그런 건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도 어린아이나 화초는 다르게 대한다. 어린아이와 화초는 변해갈 거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나와 다를 것이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을 오래 지속하는 방법은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도 성장해 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유지하며 기다려주는 데 있겠다.
 
최근에 연구된 두뇌 생리학에 따르면 사람들이 느끼는 감각의 질과 부위가 약간씩 다르다고 한다. 서로 같은 붉은색을 말하더라도 실제 느끼는 색감이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맛에 대한 감각도 아주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맛에 대한 표현이 다양하다.
 
이런 ‘감각의 질’을 영어로 퀄리아(Qualia)라고 부르는데 묘한 특징이 있다. 나는 내 퀄리아를 분명히 느낄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의 퀄리아는 느낄 수 없다. 퀄리아는 자신에게는 고유하지만 타인에게 전달하기 힘든 각자의 영역이다.
 
같은 단어도 그 의미를 떠올리고 말하는 뇌 부위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도 다 다른 게 된다. [사진 pixabay]

같은 단어도 그 의미를 떠올리고 말하는 뇌 부위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도 다 다른 게 된다. [사진 pixabay]

 
같은 단어도 그 의미를 떠올리고 말하는 뇌 부위가 사람마다 다르다고 한다. ‘책, 연필, 엄마, 국가, 시’ 등의 단어를 떠올리는 뇌의 부위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도 다 다른 게 된다. 다만 자기가 예전에 체험한 감각을 떠올려 추측할 뿐이라는 거다.
 
퀄리아와 단어 연상 부위가 다르다는 말은 고통을 겪는 누군가를 위로할 때 마치 다 안다는 듯이 지레짐작하고 접근하면 큰 실수를 하는 범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차라리 “당신이 겪는 그 고통을 저는 감히 짐작도 못 하겠어요”라고 겸손하게 간접적으로 공감을 표현하는 게 옳다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사회적으로 큰 사건·사고를 통해 고통을 겪는 사람이 많이 생겼다. 일일이 손에 꼽기도 민망할 정도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어루만지고 감싸 안기보다는 갈등만 키워 가는 데 있다. 상대방을 알고 이해하려 들지 않는 데서 골이 점점 깊어진다.
 
상대방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가 나와 다를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그냥 퉁치고 넘어가자는 식은 곤란하다. 반대로 당사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허용해야 한다.
 
서양의 이원론적 사고는 몸이 갖는 느낌과 감정을 오랫동안 죄악시했다. 정신의 우월성만 강조하다 보니 몸을 도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심지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은연중에 폭력을 행사하는 게 당연시되기도 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곡해하면서 한때 종교가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전혀 그런 뜻이 아닌데도 말이다. 아쉽게도 여전히 세상은 타자를 도구와 수단으로 삼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미래 사회에서는 몸을 지니지 않은 컴퓨터 AI가 능률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 유발 하라리가 쓴 책들에서 인류 역사 해석과 우려 섞인 미래 예측을 읽으면서 마음이 답답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미래 사회에서는 몸을 지니지 않은 컴퓨터 AI가 능률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 [중앙포토]

미래 사회에서는 몸을 지니지 않은 컴퓨터 AI가 능률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지배할지도 모른다. [중앙포토]

 
사랑은 몸의 목소리를 듣는 데서 출발한다. 나아가 이웃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데로 발전해야 한다. 니체는 “이웃을 사랑하지 말고, 먼 이웃을 사랑하라”라고 말했다. 내 주변에 있는 사람, 내가 편해지는 사람만이 아니라 나와 아주 다르고 불편해지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그림자는 빛으로 향해 나아갈 때 비로소 생긴다. 어둠 속에서는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림자는 내 몸의 목격자이다. 늘 내 곁에서 내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서 한다. 증인이고 목격자이기에 목소리에 힘이 있다.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며 친밀한 존재이기도 하다. 내 키보다 훨씬 클 때도 있고 아주 작을 때도 있다. 하지만 한 번도 내 곁에서 사라진 적이 없다.
 
그림자는 내가 어떤 상표의 옷을 입었는지, 얼마짜리 장신구를 걸쳤는지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내가 딛고 선 땅에서부터 내 몸의 실루엣을 만천하에 보여줄 뿐이다. 나를 차별하지 않는다.
 
중용에 신독(愼獨)이라는 말이 나온다. 홀로 있을 때 몸가짐을 삼가라는 뜻이다. 자기를 살피는 그림자가 있으니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격언이다. 각자에게 그림자는 하나의 상징이다. 신이 될 수도 있고, 진리, 양심이 될 수도 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참 어리석게 살았다. 몸의 목소리를 소홀히 하면서 살아왔다. 자주 몸을 수단과 도구로 여기면서 살아왔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새삼 나를 지켜주는 그림자의 존재가 고마워진다. 무엇인가가 나를 그렇게나 끔찍이 사랑하고 있었다니 참 기쁘고 감사하지 않은가.
 
윤경재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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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윤경재 윤경재 한의원 원장 필진

[윤경재의 나도 시인]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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