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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최순실 일파

중앙일보 2019.03.28 00:27 종합 31면 지면보기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세계적 학자인 토드 부크홀츠가 “미국 대법원 판사의 판결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 노예제도에 관한 것도,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것도, 혹은 부시 대 고어에 관한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 일이다.
 
“보면 안다(I know it when I see it).”
 
바로 이걸 두고서다. 1964년 미국 대법원이 영화의 음란성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포터 스튜어트 대법관이 쓴 문구다. 그는 “이른바 ‘하드코어 포르노’란 짤막한 수식에 부합하는 표현물이 어떤 것인지 정의하려는 시도까지는 하지 않겠다. 다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었다.
 
‘보면 안다’가 귀에 쏙 들어오는 표현이어선지, 과장법을 좀 섞자면 폭발적인 주목을 받았다. “재판관으로 부적절한 발언”이란 비판보다 “솔직했다”는 칭송이 압도적이었다. 50년여가 흐른 지금도 인용될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직에 적격인지 보면 안다” “국익에 도움되는지 보면 안다”는 식이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구속영장 기각결정문을 보며 ‘보면 안다’를 떠올렸다. 못지않게 두고두고 회자될 ‘460여 글자’여서다. 우선 앞머리의 ‘최순실 일파’다. 누굴 뜻하는지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하는 일파도 대단했지만 ‘최순실’은 더 대단했다. 장삼이사들에겐 최순실이겠지만 진작에 개명한 터에 법정에선 최서원이다. 이번 영장판사는 그러나 사실상 판결문이랄 수 있는 결정문에 굳이 최순실이라고 썼다. 더욱이 김 전 장관에게 피의자(기소 전)·피고인(기소 후)란 전무후무한 이중신분을 부여했다. 어떤 생각이었을까.
 
스튜어트 대법관은 1981년 대법관직에서 물러날 무렵 그리 쓴 걸 후회했다. “다른 말도 많은데 이 말이 묘비명이 되겠다.” 어쩌랴 그게 인생인걸. ‘최순실 일파’ 판사는 이 결정문을 장차 어찌 여길지 자못 궁금하다.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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