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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법원 "대사관 침입자 北해방단체라 밝혀. FBI 접촉"…탈북자 있을 가능성

중앙일보 2019.03.27 05:09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AP=연합뉴스]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AP=연합뉴스]

 스페인 고등법원이 지난달 22일(현지시간) 주스페인 북한 대사관에 침입한 괴한들의 범행과 관련한 조사 내용을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멕시코 시민으로 미국에 거주하는 남성이 범행을 주도했고, 범행 후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가 미 연방수사국(FBI)과 접촉한 것으로 나타났다. 북한대사관에 침입한 10명은 자신들을 북한의 해방을 위해 활동하는 인권단체 회원들로 소개했다고 밝혀 ‘천리마민방위'(자유조선)일 가능성이 크다.
 

마드리드 北대사관 침입사건 조사결과 공개
멕시코·美·韓 국적 10명, 칼·사다리 등 구입
포르투갈 거쳐 뉴욕행…FBI에 정보 건네
탈북희망자 사전 접촉…책임자에 탈북 종용
천리마민방위 사건후 "서방서 요청와 대응"

 이들은 북한대사관 책임자에게 탈북을 종용했다가 실패했으며, 범행 전 탈북을 원하는 대사관 관계자와 접촉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법원은 설명했다. 자유조선 측이 사건 발생 사흘 후 "서방 국가에서 도움 요청이 있어 위험하지만 대응했다'는 공지를 올린 바 있어 괴한들과 함께 빠져나간 탈북자가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스페인 법원이 지난달 마드리드 북한 대사관 침입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법원 사이트 캡처]

스페인 법원이 지난달 마드리드 북한 대사관 침입 사건에 대한 조사 결과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법원 사이트 캡처]

 스페인 고등법원이 26일 홈페이지에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멕시코 시민이면서 미국에 사는 '에이드리언 홍 창(AHC)'이라는 남성이 범행을 주도했다. 괴한은 10명이었다. 이 법원 판사는 범행 관련자의 실명을 밝히지 않은 채 AHC 외에 미국 시민 ‘SR’, 한국인 ‘WRL’이 가담했다고 밝혔다. 홍 창은 범행 5일 후 뉴욕에서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접촉했다. 북한대사관에서 가져온 음성·영상 자료를 포함해 북한대사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고 판사는 설명했다. 홍 창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범행했고 신원을 밝힐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했다고 말했다고 판사는 전했다.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대표는 2017년까지 주스페인 북한대사를 지냈다. [연합뉴스]

김혁철 북한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대표는 2017년까지 주스페인 북한대사를 지냈다. [연합뉴스]

 범행 준비를 위해 홍 창은 마드리드의 가게에서 에어소프트 총기류와 전투용 칼, 손전등, 수갑 등을 여러개 샀다. 지난달 20~22일 ‘RL’과 ‘SR’ 등 다른 멤버 네 명도 큰 가위와 결박용 테이프, 사다리 등 장비를 구매한 것으로 드러났다.
 
 범행 당일인 지난달 22일 홍 창은 오후 4시 34분 북한대사관에 도착해 대사관 책임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범행 전 기업가라며 북한대사관을 방문한 적이 있어 대사관 책임자와 안면이 있었다고 판사는 설명했다. 대사관 사람들이 방심한 틈을 타 홍 창은 주변에 기다리고 있던 공범자들과 칼, 철봉, 에어소프트 총기 등을 들고 대사관에 들어갔다. 이후 안에 있던 이들을 폭행하고 결박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억류돼 있던 여성 한 명이 2층에서 뛰어내려 대사관을 빠져나온 후 소리를 지르자 이웃이 듣고 신고해 경찰이 출동했다. 경찰이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 홍 창이 북한 지도자의 얼굴이 담긴 배지가 달린 재킷을 입고 응대했다. 홍 창은 자신이 대사관 고위 관계자라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둘러댔다.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옆모습 [AP=연합뉴스]

스페인 주재 북한대사관 옆모습 [AP=연합뉴스]

 판사에 따르면 괴한들은 스스로 북한의 해방을 위해 활동하는 인권 단체 소속이라고 밝혔다. 회의실에서 한 시간가량 사람들을 억류하던 괴한 중 세 명은 대사관 책임자를 데리고 지하실로 갔다. 이후 “우리는 북한의 해방을 위해 일하는 인권 단체 회원인데, 탈북하라"고 종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임자가 북한을 배신할 수 없다고 고집하자 그를 다시 결박하고 검은 봉투로 얼굴을 덮었다.
 
 수 시간 후 이들은 컴퓨터 두 대와 하드 드라이브 두 개, 휴대전화 한 개 등을 챙겼다. 하드 드라이브에는 보안 이미지가 저장돼 있었다고 판사는 설명했다. 이들은 대사관 차량 세 대를 타고 오후 9시 40분쯤 대사관을 빠져나갔다.
북한 해방을 위한 단체인 천리마민방위(자유조선)가 스페인 북한대사관 침입 사건 사흘 후 올린 공지문 [사이트 캡처]

북한 해방을 위한 단체인 천리마민방위(자유조선)가 스페인 북한대사관 침입 사건 사흘 후 올린 공지문 [사이트 캡처]

 범행 후 홍 창은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이동한 뒤 곧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3일 뉴저지 뉴어크 공항에 도착했고, 27일 홍 창은 FBI를 접촉했다. 북한 대사관을 빠져나온 괴한들은 네 그룹으로 나뉘어 포르투갈로 이동했다고 한다. 스페인 법원 판사는 홍 창이 범행 전 북한 대사관에서 탈북하기를 원하는 누군가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로버트 팔라디노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26일 정례 브리핑에서 "미 정부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라고 말했다. 
 
 자유조선으로 이름을 바꾼 천리마민방위는 북한대사관 사건 발생 사흘 뒤인 지난달 25일 홈페이지에 “우리 조직은 어느 서방국가에 있는 동지들에게 도움 요청을 받았다. 위험도 높은 상황이었지만 대응했다”는 공지를 올렸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번 사건이 자유조선의 범행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공지 내용을 고려하면 자유조선이 북한대사관에서 탈북을 희망하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침입한 뒤 그를 데리고 도망쳤을 가능성이 있다. 북한 측이 침묵하고 있어 실제 탈북자가 있는지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다.

 자유조선 측은 지난 20일 김일성ㆍ김정일 사진이 담긴 액자를 바닥에 던져 깨뜨리는 영상을 사이트에 올리며 ‘조국 땅에서'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역시 북한대사관 침입 당시 영상일 가능성이 있다.
 
 태영호 전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는 스페인 북한대사관 침입 사건 때 핵심 암호프로그램이 담긴 컴퓨터를 도난당했을 수 있고, 비밀 전보문으로 지시할 수 없어 최근 중국ㆍ러시아 등 해외에 있는 자국 대사를 소환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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