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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지하철 임산부 전용석의 정책학

중앙일보 2019.03.27 00:23 종합 31면 지면보기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얼마 전 저녁 귀갓길 붐비는 지하철에서 볼썽사나운 장면을 목격했다. 노인과 손자뻘 될 법한 젊은이 간에 거친 말다툼이 벌어졌다. 70대쯤으로 보이는 이 어른이 “왜 젊은 친구가 임산부석에 앉아 있느냐”고 호통치자, 젊은이는 상기된 얼굴로 “임산부가 주변에 없는데 누가 앉든 무슨 상관이냐. 쓸데없는 참견 그만두시라”고 맞받아쳐 옥신각신이 한참 이어졌다. 서울교통공사는 임산부가 없더라도 전용석을 비워두자고 장려하지만 홈페이지 민원실의 험한 갈등사례들을 보면 잘 먹히지 않는 듯싶다.
 
“탈원전은 부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선거 때 조금 과장된 언어를 썼다.”
 
“소득주도 성장의 성과는 키우되 세밀하지 못해 생긴 부작용은 줄이겠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주 국회 대정부 질의에 나가 원자력발전과 경제정책에 대한 야당 질문에 답변한 요지인데 임산부 전용석을 둘러싼 갈등이 중첩돼 떠올랐다. 문재인 정권의 두 국책사업이 그간 국민적 역풍을 맞은 데 대한 총리의 반성과 해명이었지만, 승객들 간 지하철 자리다툼을 예상치 못한 임산부석 정책 후유증과 흡사했다.
 
이 총리는 이날 답변에서 “탈원전은 60년에 걸쳐 원전 의존도를 줄여가면서 그만큼 신재생에너지로 채워나가자는 (장기적) 정책”이라고 설명했지만 이미 탈원전 쇼크에 원전산업 생태계는 붕괴 중이고 한국전력 및 자회사들은 적자 수렁에 빠졌다. 원자력공학 인재도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 문 대통령이 2017년 6월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서 “새 정부는 탈원전과 함께 미래 에너지 시대를 열겠다”고 천명한 장면이 국민 뇌리에 워낙 깊이 박혀있다.  
 
소득주도 성장은 어떤가. 이 총리는 “의료비 경감, 가계비 지출 감소 같은 것들을 아우르는 개념인데 최저임금만 너무 부각됐다”고 해명했지만 국민 눈에는 최저임금밖에 보이지 않는다. 정권 초기부터 ‘최저임금 1만원’을 거세게 밀어붙인 ‘과속 스캔들’ 탓이었다. 이미 영세 자영업계엔 폐업 바람을, 어려운 근로계층엔 일자리 절벽을 초래했다.
 
서울 지하철에 임산부 전용석이 깔리기 시작한 건 2013년. 그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일반 승객의 양심을 시험에 들게 하는 ‘눈치석’이 되어버렸다. “저출산 극복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서울시도 이토록 정성을 다한다”는 걸 시민에게 보란 듯 고하고 싶었을 테지만, 역풍이 있을 수 있다는 상상력이 부족했다. “자리 양보가 배려냐 의무냐” 논란에다, “여성전용석이 돼 버렸다”는 남자 승객들의 볼멘소리도 비등했다.  
 
한 청년 유튜버는 “피로에 찌든 직장인이나 학생들에게 임산부석을 비워둔 채로 서서 가라고 강요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라고 따졌다. 이런 격론들이 SNS를 채우면서 여혐(女嫌) 갈등까지 부추긴다. 지난해 임산부석 관련 서울시 민원은 2만7000여 건으로 하루 평균 70건이 넘었다
 
약자를 위한 선한 정책이라고 다들 잘 따라주겠거니 여기고 역지사지와 준비를 게을리한 정책은 실패하기 쉽다고 정책학 개론은 가르친다. "임산부석 하나 포용하지 못하느냐.” 압축성장과 무한경쟁에 찌든 대도시의 각박한 시민의식 탓만 할 게 아니다. 우리나라 사회갈등지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여 회원국 중 5위에 올라있다.  
 
성선설(性善說)에 너무 기운 교통약자 정책은 아니었는지, 현실적으로 임산부석을 노약자석과 합치는 건 어떨지 재고해 볼 때다. 장애인·노인·임산부·어린이 같은 노약자를 누구부터 먼저 앉힐지 정해놓은 유럽 일부 국가의 궁여지책이라도 본떠야 할 판이다. 탈원전과 소득주도 성장처럼 임산부 배려 정책에도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었다.
 
홍승일 중앙일보디자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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