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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필의 인공지능 개척시대] 인공지능과 맞춤형 규제

중앙일보 2019.03.27 00:23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병필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김병필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시속 100㎞의 제한 속도가 낮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도로가 미끄러운 날에는 제한 속도에 딱 맞춰 운전하고 있는 차를 보면 위험하다는 생각도 든다. 과연 법이란 이렇게 언제 어디서나 똑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선 최고 속도 규제의 존재 이유부터 따져보자. 고속도로 이용자의 안전을 우선시하면 제한 속도를 시속 80㎞로 더 낮추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반대로 교통량을 늘리려면 시속 120㎞로 높이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이처럼 이용자의 안전 보장과 원활한 교통량 달성이라는 목표는 서로 충돌하는 면이 있다. 최고 속도 규제는 상충되는 목표를 적절히 타협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시속 100㎞가 최적의 타협점이라 할 수 있을까? 긴 시야가 확보된 맑은 날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로 느껴지지만, 도로가 미끄러운 날에는 규제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날씨와 도로 상황, 교통량에 맞추어 제한 속도를 달리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맞춤형 속도 제한은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 그리고 5G 통신 기술이 결합된다면 언제 어디서나 실현 가능할 수 있다. 우선 사물인터넷을 통해 노면 상태, 가시거리, 운행 자동차 수 등의 데이터를 축적한다. 다음으로 인공지능이 빅데이터를 활용해 실시간으로 적절한 제한 속도를 계산해 낸다. 이제 5G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주행 중인 차량에 제한 속도를 실시간으로 알려줄 수 있다. 그러면 모든 차량들이 가장 안전하면서도 효율적인 속도로 주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 3/27

인공지능 3/27

이러한 아이디어는 다른 규제에 응용해 볼 수 있다. 청년 창업자가 갓 설립한 스타트업과 초대형 다국적 기업에 일률적인 규제가 적용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스타트업을 생각해서 규제를 완화하기도, 다국적 기업을 고려해서 규제를 강화하기도 쉽지 않다. 규제 수준을 일의적(一義的)으로 완화하거나 강화하는 것은 어느 한 쪽에서 부작용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맑은 날을 생각해서 제한 속도를 더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나 도로가 미끄러운 날을 생각해서 제한 속도를 더 낮춰야 한다는 주장이 대립되면 적절한 해법이 나오기 어렵다. 이 때 인공지능이 빅데이터를 활용해 최적의 제한 속도를 찾아낼 수 있는 것처럼,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유연한 규제 시스템을 도입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학술 용어를 빌리자면 ‘맥락 맞춤형(context specific)’ 규제라 할 수 있겠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어 금융 소비자 보호 규제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복잡한 금융 상품의 내용을 줄줄이 꿰고 있는 이른바 ‘프로슈머’들과 이제 갓 금융 거래를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에 같은 규제를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사회 초년생들에게는 보다 두터운 보호를 제공하고, ‘프로슈머’들에 대해서는 완화된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수 있다. 각각의 소비자에 맞는 최적의 규제 수준을 계산해 내기 위하여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 발전에도 불구하고, 법이 반드시 ‘획일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고정 관념일 수도 있다. 기업들이 인공지능을 이용한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이제 정부 규제도 그에 따라 맞춤형으로 진화할 수 있지 않을까? 빅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을 이용한다면 구체적 상황에 맞는 유연하고 합리적인 개별 규제가 가능할 수 있다. ‘맞춤형 규제’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
 
김병필 KAIST 기술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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