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론] 인사말 실수보다 부실한 순방 콘텐트가 문제다

중앙일보 2019.03.27 00:21 종합 32면 지면보기
김이재 경인교대 교수·한국동남아연구소 연구위원장

김이재 경인교대 교수·한국동남아연구소 연구위원장

말레이시아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현지에서 인도네시아어로 인사말을 해 외교 결례 논란을 일으켰다. 의전의 소홀함은 뼈아픈 실책이다. 다만 말레이시아 현지에서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다. 역사적으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문화의 뿌리가 같고 최근 두 나라 사이에 인적 교류가 활발한 데다, 아세안 공동체 의식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인·맏사위를 비롯해 가족 중에 인도네시아 출신이 여럿 있는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가 현지 문화를 존중하려 노력하는 외국 지도자의 실수를 이해하고 넘어간 것 같다.
 

동남아에 대한 무지·편견 벗어나
현지인 매혹시킬 콘텐트·행보 절실

오히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유적지에서 “이렇게 큰 문명이 몰락한 이유”를 질문한 대통령의 대화 소재가 부적절했다. 역사학자가 꿈이었던 대통령에게는 흥미로운 주제였을지 몰라도 현지인들은 위험한 발언으로 느낄 수도 있다.
 
필자가 보기에 더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부실한 아세안 순방 콘텐트였다. 인사말 외교 결례 논란으로 드러난 동남아에 대한 무지와 편견은 정부·학계·언론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뿌리 깊은 고질병이다. 한국의 동남아 지역전문가가 매우 부족한 데다 신(新)남방 정책의 비전과 구체적 전략·실행 계획이 미흡하다 보니 아세안 순방마저 기존 관행에 의존한 형식적 의전으로 채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번 아세안 순방의 핵심 주제였던 ‘인프라 및 스마트시티 구축, IT 및 할랄 산업 협력’은 대통령이 선언한다고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신남방 정책의 비전과 전략이 담긴 진짜 경제지도 위에 현지에서 경쟁력 있는 한국 문화를 선별해 세련되게 접목한 신개념 스마트시티 모델을 시각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현지 정부의 관심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작더라도 확실한 성공 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도 전략이다.
 
신남방 정책과 한국 상황과의 연계도 중요하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 무슬림인 아세안에서 사람 중심 신남방 정책이 성공하려면 한국에서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 교육이 시급하다. 18억명이나 되는 전 세계 무슬림을 깎아내리는 표현이 일상화된 한국은 ‘이슬람 공포증’이 심하다. 무슬림 인구가 많은 브루나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와 협력을 강화하고 할랄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우선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이슬람에 대한 오해와 편견부터 걷어내야 하지 않겠나.
 
사실 차세대 성장엔진으로 떠오른 아세안은 한국만 공을 들이는 게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지역이다. 동남아 지역연구 전통이 오래된 일본은 장기적 관점에서 세심하게 아세안 전 지역을 파고드는 전략이다. 경제가 식어가는 중국에도 아세안은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알리바바·화웨이 같은 중국 기업과 자본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한 배경이기도 하다. 미국에도 아세안은 중국 견제를 위한 핵심 전략 지역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사례처럼 이제는 국가 지도자의 매력과 개성도 경쟁력이 되는 시대다. 글로벌 외교전쟁터에서 국격을 높이고 자국의 정책을 홍보하는 기회로 국가 원수의 순방만 한 것이 없다. 아쉽게도 문 대통령은 일주일간의 아세안 순방에서 기억에 남을 역사적 명장면, 훈훈한 에피소드를 남기지 못했다.
 
수도와 관광지 중심 순방 일정과 관습적인 동선은 현지에서 주목받기 어렵다. 기업인과 한류 스타를 대동해 대통령이 축사하는 뻔한 행사, 평범한 일정으로는 감동도 실익도 없다. 미래지향적 비전과 함께 현지인을 매혹시킬 콘텐트, 파격적 행보가 이어져야 순방 효과가 극대화되고 현지 언론도 대서특필하기 좋다. 현지인들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장소에서 참신한 방식으로 핵심 어젠다를 제시하는 ‘외교적 상상력’이 절실한 이유다.
 
김이재 경인교대 교수·한국동남아연구소 연구위원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