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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매독의 또 다른 이름

중앙일보 2019.03.27 00:15 종합 35면 지면보기
권혁주 논설위원

권혁주 논설위원

매독이 처음 별명을 얻은 건 15세기 말 프랑스가 이탈리아 나폴리를 원정한 직후였다. 무주공산을 가듯 나폴리까지 진격했으나 군대에 매독이 번져 철수했다. 얼마 후 이탈리아에서는 매독을 ‘프랑스 병’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침공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 뒤로도 매독에는 많은 별명이 생겼다. 나라끼리 원수질 때마다 이름이 하나씩 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 병’, 러시아는 ‘폴란드 병’이라고 불렀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를 상대로 독립 전쟁을 벌인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병’이라고 했다.
 
지금 한·일 관계도 매독에 상대방 이름을 집어넣던 옛 유럽 못지않다. 서로에게 긴요한 경제 동반자인데도 그렇다. 지난해 일본과의 교역은 총 850억 달러에 이른다. 중국·미국에 이어 3위다. 두 나라가 함께 해외 자원개발을 한 것만 100건이 넘는다. 일본의 장비 없이는 ‘반도체 왕국’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일제강점기의 만행에 대해 여태껏 제대로 사과하지 않은 것은 밉지만, 어쨌든 일본은 손잡아야 할 경제 파트너다.
 
그러나 양국 정치는 이런 관계에 쩍쩍 금을 갈랐다. 최장집 교수 표현에 따르면 ‘관제 민족주의’까지 동원해서다. 한때 문재인 대통령은 갈등을 봉합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지난해 말 사법부가 강제징용 배상을 확정한 직후였다. 한·일의원연맹 대표단을 만나 “양국 간 우호 정서를 해치는 것은 미래 관계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강제징용 배상에 대해 “정부부처와 민간, 전문가들이 모여 해법을 모색해 나갈 계획”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 뒤로 해법은 감감무소식이다. 그러는 사이 국내에선 강제징용 일본 기업에 대한 자산 압류 결정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보복 카드를 만지작거린다. 이러다 매독에 ‘일본 병’ ‘한국 병’이란 별명까지 덧붙는 건 아닐지 걱정스럽다. 
 
권혁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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