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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벨기에 국왕, 참전용사 기린 날…천안함 추모식엔 여당 ‘0’

중앙일보 2019.03.27 00:05 종합 10면 지면보기
국빈 방한 중인 필리프 벨기에 국왕 내외가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6·25전쟁 벨기에 참전용사 추모식’에 참석해 벨기에 전사자명비를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

국빈 방한 중인 필리프 벨기에 국왕 내외가 26일 오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6·25전쟁 벨기에 참전용사 추모식’에 참석해 벨기에 전사자명비를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

이날만큼은 ‘폐하(His Majesty)’도 고개를 숙였다. 26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벨기에 전사자 추모비 앞에서 선 벨기에의 필리프 국왕의 모습이다. 초연한 조가(弔歌)가 트럼펫으로 나지막히 연주되는 2분간 필리프 국왕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폐하는 벨기에군 전사자들에게 최고의 예의를 표했다.
 

국왕, 용산 전쟁기념관 찾아 추도
‘그들의 희생 잊지 않겠다’ 메시지
‘서해 수호의 날’ 대통령 참석 안 해
한국은 북한 의식 천안함 홀대

벨기에는 6·25 참전 16개국 중 하나다. 1951년 1월 룩셈부르크 자원병 78명을 포함하는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낯선 한국을 도우러 떠났다. 당시 벨기에 상원의원이자 국방부 장관이었던 앙리 모로 드 믈랑은 파병을 하지 말고 장비만 지원하자는 제안을 물리쳤다. 그는 장관직을 내려놓고 소령 계급으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에 합류했다. 당시 드 믈랑의 나이는 50세였다.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는 금굴산 전투·학당리 전투·잣골 전투 등을 치르며 106명이 목숨을 잃고, 500명 넘게 다쳤다. 피터 드 크렘 벨기에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날 열린 벨기에 참전용사 추모식에서 “6·25 전쟁은 세간에서 ‘잊혀진 전쟁’이라고 불리곤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며 “이 전쟁에서 많은 이들이 전우를 잃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들의 기억을 우리가 간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이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며 “우리는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고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평화를 지켜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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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국왕은 추모행사가 끝난 뒤 9명의 참전 용사들과 만났다. 한국전 참전협회장인 레이몽드 베르를 제외한 8명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이들은 ‘벨기에 카투사’라 불리던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 배속 한국군이었다. 다들 벨기에군의 상징인 갈색 베레모를 썼다. 필리프 국왕은 마틸드 왕비와 함께 8명과 일일이 악수하면서 “벨기에를 위해 복무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벨기에 카투사 김호식(84)씨는 필리프국왕과는 두번째 만남이다. 왕세자 시절인 2000년에도 방한했던 필리프 국왕은 김씨에게 레오폴드 2세 훈장을 줬다. 이 훈장은 벨기에를 위해 공헌한 벨기에인과 외국인에게 주어진다. 김씨는 6·25 전쟁 발발 50주년인 당시 벨기에·룩셈부르크 대대의 참전을 기념하는 행사를 기획했다. 김씨는 “국왕에게 훈장을 보여주며 그때 일을 얘기해줬더니 너무나 반가워했다”고 말했다.
 
필리프 국왕 내외는 전쟁기념관 벽면의 벨기에 전사자명비에서도 추도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벨기에는 제1,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침략을 받았다. 한국 근현대사와 많이 닮았다.
 
벨기에 왕실이 추모행사에서 ‘잊지 않겠다’와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전한 이 날은 천안함 폭침 9주기이기도 했다. 2010년 3월 26일 서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해군 천안함이 북한의 어뢰 공격에 침몰하면서 40명이 사망했고, 6명이 실종됐다. 그날 살아남은 장병들 일부는 아직도 몸과 마음의 상처와 싸우고 있다.
 
이날 필리프 국왕과 함께 추모행사에 참석한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20일 국회에서 천안함 폭침·제2 연평 해전·연평도 포격을 “불미스러운 남북 간 충돌”이라고 언급했다가 비판을 자초했다. 22일 서해 수호의 날 행사엔 문재인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고 조화만 보냈다. 이날 천안함 추모식에서 여당 의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위기에 빠진 남북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가급적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 희생은 정당이나 이념과 관계가 없다. 그 자체로 기억되면 될 일이다. 벨기에 왕실을 보며 부러웠던 26일이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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