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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노을빛, 김혜자 선생은 피눈물을 삼켰다

중앙일보 2019.03.27 00:05 종합 25면 지면보기
진한 여운을 남긴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연출한 김석윤 감독(왼쪽)과 배우 김혜자. [사진 JTBC]

진한 여운을 남긴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연출한 김석윤 감독(왼쪽)과 배우 김혜자. [사진 JTBC]

배우 김혜자(78)의 열연이 눈부셨던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의 여운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 이어받아
“치매문제 진실되게 그리려 애써”
후반부 반전에 돌 맞을까 걱정도
“이남규·김수진 작가의 협업 빛나”

25세 혜자(한지민)가 우연한 계기로 갑자기 늙어 70대 노인(김혜자)의 몸으로 살아가는 9회까지의 전개는 더 큰 감동을 위한 ‘트릭’이었다. 모든 에피소드가 치매환자 혜자의 머릿속에서 펼쳐진 환각이었다는 충격적 반전을 선사한 드라마는 후반부(11·12회)에 환각과 포개지는 혜자의 아름답고도 가슴 아픈 개인사를 펼쳐놓는다. 그리고 ‘때론 불행하고, 때론 행복한 인생이었지만,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찬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타임슬립 서사에 코미디를 섞고, 결국엔 ‘대단하진 않지만 살 가치가 충분했던’ 개인사를 통해 삶의 의미를 길어올린, 수려한 연출력도 웰메이드란 평가에 큰 몫을 했다. JTBC 개국드라마 ‘청담동 살아요’로 김혜자와 인연을 맺은 김석윤(55) 감독은 이 작품이 ‘청담동 살아요’의 연장선이라 했다. 주인공 혜자가 50년전 자신과 소통하는 마지막회 내용이 ‘눈이 부시게’의 씨앗이 됐다는 의미다.
 
왜 김혜자였나.
“‘청담동 살아요’ 속편이 나오면 출연하고 싶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아예 김혜자 헌정드라마를 만들기로 했다. 협업해온 이남규·김수진 작가와 평소 관심있던 노화 소재로 진실된 스토리를 만들려 했다.”
 
그런 드라마에 출연하는 걸 김혜자 배우가 흔쾌히 동의했나.
“선생님이 tvN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 이후 치매 관련 작품을 안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멋진 작품’이란 우리의 말을 믿고 출연해주셨다. 치매를 부정적이지 않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뿌듯해하신다.”
 
25세 연기에 대해 부담이 컸을 것 같다.
“선생님이 부단히 연습하셨고, 현장에서 ‘목소리 얇게 가볼게요’라고 가끔 주문한 것 외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자신의 모든 걸 하얗게 불태운 혼신의 연기였다. 먼저 떠나보낸 남편 등 자기 삶과 겹치는 부분도 있어 상당히 감정이입하신 것 같다. 치매 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10회 엔딩에서 자신의 젊은 모습인 한지민을 애틋한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치매 환자의 내면으로 들어간 최초의 작품이란 평가다.
“김혜자 배우와 노화에 대한 드라마를 하기로 했으면, 과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치매 노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에 집중했다. 머릿속에 섬망과 과거 기억, 바람이 섞였다는 전제하에 모든 스토리가 가능했다.”
 
엄청난 반전을 감춰놓았기에 부담도 컸을 듯하다.
“흥미로운 전개로 시청자들을 붙들어뒀다가 반전이 밝혀진 후반부에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반전을 알고 다시 봐도 허망하지 않도록 아귀를 맞추려 했지만, 부담도 컸다. 반전이 나오는 10회가 끝나고 시청자들로부터 ‘무책임하다’는 비난과 함께 돌 맞을 줄 알았다. 하지만 홍보관 노인들이 감금된 준하(남주혁)를 구출해내는 ‘노벤져스’ 활약을 기점으로 반전이 효과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세상엔 늙은 사람과 아직 안 늙은 사람이 있을 뿐이란 것이다. 노인들을 태어날 때부터 노인이었던 것처럼 대하는 시선과 혐오가 없어졌으면 좋겠다. 늙음이 공평하다는 생각을 하면 세대 갈등이 있을 수 없다.”
 
노인 문제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고, 노인복지원에 다니는 80대 노모의 인지능력이 점점 떨어지는 걸 보며 치매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누구든 피해갈 수 없는 문제다.”
 
쓸쓸한 노년의 삶과 출구 없는 젊은 세대의 현실을 포개놓았는데.
“‘청담동 살아요’ ‘송곳’ 등의 작품을 통해 좌절과 꿈 사이를 오가는 이들의 얘기를 해왔기에 이 작품에도 자연스레 ‘흙수저’들이 들어간 것 같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88만원 세대가 위안받았다니 기분이 좋다.”
 
‘에러도 아름다울 수 있어. 오로라처럼’이란 대사가 젊은 세대에 큰 위안이 됐다.
“혜자와 준하가 함께 바라보는 이상향으로서 오로라를 떠올렸는데, 김수진 작가의 손끝에서 스스로 에러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 모든 준하를 보듬는 치유의 말로 바뀌었다.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라는 감동적인 엔딩 내레이션도 김 작가가 썼다. 이남규 작가의 코미디, 김 작가의 감동적인 대사가 합쳐져 드라마가 순항할 수 있었다.”
 
준하의 고문사 대목에서 유신에 맞서 싸운 언론인 장준하의 의문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준하란 이름은 그의 죽음을 고문사로 결정하기 전에 지은 것이다. 나중에 장준하 선생이 떠오를 수 있겠단 생각을 했지만, 굳이 바꾸고 싶진 않았다. 돌아오지 못한 유품인 시계 등 우연이 너무 겹치다 보니, 장준하 선생이 신묘하게 작품 속으로 들어오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장면에서 가장 눈물이 났나.
“마지막회 혜자가 눈 쓸다가 아들(안내상)과 화해하는 장면에 가장 많이 신경이 쓰였다면,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울었던 대목은 혜자가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어린 아들 손을 잡고 퇴근하는 남편 준하를 마중하던  때를 꼽는 회상신이다. 노을을 더 예쁘게 만들고 싶었다. 일상적인 모습이지만, 내 예전 기억과 겹쳐지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이 때 김 감독의 눈시울이 다시 촉촉해졌다.)
 
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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