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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피와 눈물의 등가교환 법칙

중앙일보 2019.03.26 00:29 종합 30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에서 배운 게 있다.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주인공 김혜자는 이 법칙에 의해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는다. “뭔가를 갖고 싶으면 그 가치만큼 뭔가를 희생해야 돼.” “모든 일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니까요.”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니까요”
재수사 대상 된 김학의 부실수사
“인간은 등가” 절규 잊지 말아야

혜자는 미장원에서 파마 값을 깎으려는 손님에게 대꾸한다. “머리하는 내내 서서 손으로 다 해주는 걸 2만원이 비싸다고 하면 안 되죠.” 혜자는 또 “분리수거해서 경비들끼리 나눠 갖는다”며 막말하는 아파트 주민 앞에 선다. “이 사람 이거 팔아서 10원 한장이라도 들고 왔으면 내가 대신 수갑 찰게.”
 
그가 그토록 ‘등가’에 절박했던 건 등가교환이 안 되는 삶을 살아야 했기 때문일까. 현실은 더 가혹하다. 김학의 사건과 장자연 사건을 보자. 가해자들은 등가의 대가를 치렀는가. 김학의 사건의 여성과 장씨가 밝히려고 했던 진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결국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는 김학의 사건 재수사를 권고했다. 곽상도 전 민정수석 등의 ‘경찰 수사 방해’ 의혹도 수사 대상에 올랐다. 주요 혐의 공소시효(10년)도 지났는데 새로운 혐의(뇌물)로 다시 수사하는 건 지나치지 않냐고? 되묻고 싶은 건 이것이다. 철저하게 수사하다 이렇게 된 것인가.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고, 미루느라 그 깃털같이 많은 날을 날려버린 것 아닌가.
 
누군가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비정상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법. 등가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은 데는 내부자들의 눈부신 노력이 있었다. 2013년 김학의 사건 수사 과정에서 경찰 지휘라인이 바뀌고, 영장 10건이 검찰 단계에서 막힌다. 통신, 압수, 체포…. 영상 원본을 확보하려는 경찰의 영장 신청은 4차례 기각된다.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진다.’ ‘성폭력 혐의는 소명되지 않았다.’ 치약 튜브 쥐어짜듯 이유를 댄다.
 
검사 출신 변호사의 지적이다. “김학의 전 차관도 보호하고, 청와대 눈치도 봤겠지만 다른 문제가 튀어나올까 봐 그랬던 거 아닌가 싶어요. 이번에 승리 단체 카톡방에서 정준영 불법 촬영 드러난 것 보세요. 압수수색 잘못 했다가 다른 검찰 간부 커넥션이 고구마 줄기처럼 나올 수도 있고…. 최소한 수사 절차는 제대로 밟았어야죠.”
 
장자연씨의 동료배우 윤지오씨도 수사기관에서 10여 차례 증언했지만, 조사는 같은 자리를 맴돈다. 경찰은 장씨 집을 고작 57분 압수수색하면서 핵심물증(다이어리)은 스치고 지나간다. 두 사건 모두 ‘공소시효를 넘기기 위해 기획된’ 부실 수사였던 것일까.
 
김학의, 장자연, 버닝썬 사건에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돈과 권력이 춤추는 “섹스 스캔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등가의 법칙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고 그런 여자일 뿐인데….’ 여성 혐오의 집단의식 속에 누구 하나 대가를 치르라 말하지 않았다. “10원이라도 들고 오면 수갑 찬다”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수많은 김혜자들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은 단 한구석도 공정하지 않았다.
 
이제 당시 수사 관련자들을 거짓말탐지기 앞에 앉혀서라도 이 은폐의 막장 드라마를 끝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검·경이 부등가교환에 앞장섰다는 불신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가해자들 위해서 피해자를 바보 만드는 국가기관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등가의 시계추가 멈추는 순간 시민들은 무서운 직관으로 알아차린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 김태우 사건, 신재민 사건도 다르지 않다. 원칙대로, 등가로 가면 된다. 그러니 법률가들이여, 등가를 거리의 사람들에게만 강요하지 말라. 당신들부터 지켜라.
 
피해자들이 피와 눈물로 절규한 건 법치주의를 흔들자는 게 아니다. 성별·권력·돈으로 차별하지 말고, 오직 등가로 해달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등가’라는 것이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이였고, 딸이었고, 나였을 그대들”에게 혜자는 말한다. “눈이 부시게 오늘을 살아가라”고.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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