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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문 대통령은 나경원에게 큰절이라도 해야 한다

중앙일보 2019.03.25 00:04 종합 35면 지면보기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속시원하게 할 말을 제대로 했다.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얘기를 듣지 않도록 해 달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가 발언 도중 단상에 올라가 멈춰 달라고 항의하고, 이해찬 대표가 국가원수 모독죄라고 흥분한 건 과민반응이다.
 

야당·언론을 불경죄로 몰아가면
민주주의 시스템 작동 멈추게 돼
‘김정은 수석대변인’ 거슬리지만
비핵화 설득엔 다원사회가 큰 힘

북·미 협상의 성공과 한반도 평화를 위해 전력투구하는 국가원수에 대한 악의적 공격을 막겠다는 것이 여권의 정서다. 그래서 민주당 대변인은 나경원이 인용한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에서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 됐다’는 제목의 기사를 쓴 블룸버그통신 기자를 비난하는 논평까지 냈다. 한국 국적 기자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했다. 사과는 했지만 공당의 품격은 땅에 떨어졌다.
 
‘야당(野黨)’은 ‘opposition party’의 번역어다. 반대하는 것이 태생적 존재의 이유다. 민주주의와 정당정치는 힘을 가진 집권당(ruling party)을 견제하고 감시하는 야당과 언론이 있어야 건강하게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설계돼 있다. 그런데 김정은은 기대했던 완전 비핵화의 의지와 실천을 보여주지 않아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 원인을 제공했다. 그래서 중재자 역할을 하면서 북한과 김정은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문 대통령을 야당에서 비판한 것이다.
 
야속하겠지만 이걸 불경죄로 몰아가는 것은 독재시대의 발상이다. 우리 진영에서 나오지 않은 ‘악마의 대변자(Devil’s advocate)’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까. 대통령을 향한 비판을 틀어막기 위해 야당과 언론에 침묵을 요구하면 민주주의 시스템은 작동을 멈추고, 공동체는 공멸한다.
 
헝클어진 북·미 협상의 구도를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서는 김정은이 완전 비핵화의 정의(definition)와 의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이제 김정은을 만나면 “내가 당신의 수석대변인이라고 공격받고 있는데 더 늦추지 말고 결단하라”고 촉구할 수 있게 됐다. ‘수석대변인’이라고 비판한 나경원에게 큰 절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집권세력이 야당과 언론의 비판을 너그럽게 경청하면 북한에 다원사회의 깊이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다. 북한이 한국 대통령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야당과 보수의 민심을 모두 헤아리게 된다. 미국을 상대할 때는 우호적인 트럼프 대통령뿐 아니라 껄끄러운 의회, 회의적인 시각의 언론·싱크탱크의 목소리와 의도를 살펴보게 된다. 이렇게 북한이 다원사회의 메카니즘을 몸으로 이해하게 된다면 남북, 북·미 협상은 한결 원활해질 것이다.
 
1990년부터 북한과 남북 강원도 교류협력을 해 온 정성헌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은 “○○일보 악질이지요?”라는 식의 계산된 질문을 받곤 했다. 그는 “악질이지만 남쪽에서 독자가 제일 많아요.”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친해지기 위해 북한의 프레임에 쉽게 동조하면 남한 사회를 오독(誤讀)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을 정확하게 알려주면 한국이 다양한 그룹이 움직이는 다원사회임을 알려줄 수 있다. 그러면 이쪽을 절대로 만만히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물론 블룸버그 통신 기사에는 강한 제목을 뒷받침하는 사실은 없다. 한국 언론이었다면 신문윤리위원회로부터 과장·왜곡된 의견성 제목을 달았다는 이유로 제재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 운영에 무한책임을 지는 집권세력이 야당과 언론을 극단적으로 몰아붙인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이해찬은 국가원수 모독죄를 거론했고, 대화의 창구인 야당 원내대표를 국회윤리위에 제소하도록 했다. 1988년 초선의원으로서 유신 시절 박정희 체제 비판을 봉쇄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모독죄의 폐지에 찬성했던 사람의 언행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서울대 운동권의 핵심으로 명석하고 논리정연한 그를 발탁하고, 공들여 키운 사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야당 출입 시절 가까이에서 접한 김대중은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큰 정치인답게 여유가 있었다. 자신의 뜻을 왜곡한 기사가 나오면 “기자들이 참 대단하다. 별 생각없이 말했는데 기사를 보면 김대중이가 이런 뜻으로 얘기했구나라고 탄복하게 된다”고 조크했다.
 
김대중은 언론을 원망하는 대신 성향을 불문하고 언론인들과 끊임없이 토론했다. 영어를 늦은 나이에 배웠지만 수시로 외국 언론인들과 통역 없이 인터뷰하면서 자신의 진의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지금의 집권세력은 국내외 언론인들과 국정 현안을 놓고 깊이 있는 소통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해찬이 정치적 멘토였던 김대중의 관용과 치열함을 기억했다면 나경원의 발언에 이토록 극단적으로 반응하진 않았을 것이다.
 
남북 문제는 야당이 강하게 비판할수록 대통령이 큰 힘을 받게 된다. 여권은 발상을 전환해 야당을 넓은 의미의 우군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면 보수·진보의 협력을 통해 남남통합이 이뤄지고, 북한의 완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도 앞당겨질 것이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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