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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환자 김혜자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중앙일보 2019.03.22 00:04 종합 23면 지면보기
혜자(김혜자)가 되찾으려는 시계는 드라마의 반전과 함께 의미가 더욱 또렷해진다. [사진 JTBC]

혜자(김혜자)가 되찾으려는 시계는 드라마의 반전과 함께 의미가 더욱 또렷해진다. [사진 JTBC]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지금 삶이 힘든 당신…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은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타임슬립 넘어선 인생 드라마
JTBC ‘눈이 부시게’가 남긴 감동
기억의 가치, 시간의 의미 돋보여
“극적 반전이 뭔지 제대로 보여줘”

25세에 갑자기 70대처럼 늙어버린 혜자는 젊음을 되찾는 대신 뭉클한 감동을 남겼다. 배우 김혜자는 실명 그대로 주인공 혜자 역할을 맡아 눈부신 연기를 보여줬다. 드라마 마지막의 내레이션도 그의 몫이었다.
 
19일 막 내린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청춘의 상처와 노년의 고통을 고루 어루만지는 섬세함, 이를 관통하며 생을 긍정하는 깊은 울림으로 오래 기억될 드라마다. “최근 보기 드문 수작”이자 “여운을 남기며 생각을 곱씹게 하는 빼어난 작품”(드라마평론가 윤석진 교수)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첫 회 3.2%로 시작한 시청률은 마지막 회 9.7%(이상 닐슨코리아, 전국 유료가구 기준)까지 올랐다.
 
시작은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가 나오는 타입 슬립 판타지, 혹은 청춘 로맨스 드라마 같았다. 하지만 25세 혜자(한지만)를 비롯한 요즘 청춘의 좌절감, 늙어버린 혜자(김혜자)가 실감하는 노화의 힘겨움과 노인의 처지를 예리하게 그려내는 전개는 그 이상이었다.
 
놀라운 반전은 10회에 등장했다. 혜자가 실은 치매 노인이라는 것. “긴 꿈을 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르겠습니다. 젊은 내가 늙은 꿈을 꾸는 건지, 늙은 내가 젊은 꿈을 꾸는 건지.” 혜자는 내레이션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준하(남주혁)와 혜자(한지민)의 데이트. [사진 JTBC]

준하(남주혁)와 혜자(한지민)의 데이트. [사진 JTBC]

첫 방송 전 촬영이 끝난 이 사전제작 드라마에서 치매는 깜짝 효과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전개와 맞물려 주제와 구조 모두 깊이를 더했다. 하재근 평론가는 “과거 영화나 드라마에서 치매가 주위를 괴롭게 하는 고통스러운 질병으로, 치매 노인이 주변부 인물로 그려졌다면 ‘눈이 부시게’는 주역으로 등장시켜 그분들 입장과 시선에서 이해하려 했다”며 “치매를 타임슬립 설정으로 바꾼 아이디어 자체가 반전”이라고 말했다.
 
치매 환자의 시선에서 펼쳐진 이야기의 새로움과 완성도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영화평론가 강유정 강남대 교수는 “알츠하이머 환자를 서사의 주체로, 말할 권리를 가진 인물로 그려낸 점에서 큰 걸음을 내디딘 드라마”라며 “많은 사람들이 알츠하이머에 대해 ‘나는 아니겠지’라는 두려움에서 대상화하려는 욕구가 있는데 이 드라마는 노인이나 노화를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그 내면으로 들어가 공감할 수 있게 그려냈다”고 말했다.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기웅 교수는 “드라마를 굉장히 인상 깊게 봤다”며 “실제 병이 진행되면 환자들은 과거의 기억, 자기의 감정이 가미된 기억 시점과 그 기억을 떠올린 현재 상황의 단서들이 뒤섞여 현재와 과거를 착각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를 환자의 1인칭 시점을 가미해 잘 그려냈다”고 말했다. 그는 “치매를 앓는 분의 행동에서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다른 사람에겐 의미가 없지만 그분에게는 의미가 있는 단서로 작동해서 저럴 수 있구나, 완전한 환상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구나 하는 점을 부각하기에 좋은 작품”이라고 밝혔다.
 
매회 눈물과 웃음을 고루 맛보게 하는 구성, 유려한 영상미도 두드러졌다. 연출자 김석윤 PD와 이남규·김수진 작가는 ‘올드 미스 다이어리’ ‘청담동 살아요’ ‘송곳’ 등 이미 여러 작품에서 호흡을 맞춰왔다. 공희정 평론가는 중견 이상 배우들이 극 중 노인들로 대거 등장한 점도 주목했다. 그는 "요즘 TV에서 자주 볼 순 없어도 평생 연기를 해온 분들의 연기, 삶이 묻어나는 연기가 전해준 메시지가 깊었다”며 "중간중간 등장하는 유머 역시 이 드라마를 맛깔나게 했다”고 말했다.
 
드라마평론가 충남대 윤석진 교수는 "그전까지 한국 드라마에서 기능적인 요소로 봤던 알츠하이머를 환자의 시점에서 풀어내며, 모두가 자기 인생이란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점을 굉장히 섬세하게 그려냈다”고 했다. 특히 "정통 극작법에서 반전은 눈속임이 아니라, 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넘어가면서 깨달음과 삶에 대한 통찰력이 얻어지는 것”이라며 "이런 점에서 반전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준 드라마”라고 말했다. 그는 "반전을 극대화하기 위해 앞서 시간을 돌린다는 판타지를 너무 강조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12회에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며 이야기를 잘 마무리했다. 여러모로 흠잡을 데가 없는 드라마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2인 1역으로 25세 혜자를 연기한 한지민, 두 명의 혜자와 모두 호흡을 맞춘 남주혁에게도 칭찬이 쏟아진다. 무엇보다 김혜자는 그 하나만으로도 이 드라마를 볼 충분한 이유가 됐다. 70대 몸에 깃든 20대 감성을 표현하는 전례 없는 역할을 맡아 감칠맛과 깊은 맛이 모두 배어나는 연기로 소화했다. 그가 오래전 단골로 출연했던 광고에서 한 말이자, 이 드라마에서도 거듭 응용한 말 그대로다. "그래 이 맛이야.”
 
이후남·나원정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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