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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물그릇 깨면서 농민 말은 왜 안 듣나”

중앙일보 2019.03.21 01:00 종합 1면 지면보기
전남 나주시 다시면에 위치한 죽산보. 환경부 4대강 조사평가기획위원회는 지난달 22일 경제성 평가를 거쳐 죽산보를 해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나주시 다시면에 위치한 죽산보. 환경부 4대강 조사평가기획위원회는 지난달 22일 경제성 평가를 거쳐 죽산보를 해체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프리랜서 장정필

“2008년 국토해양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기준으로 영산강 일대에서는 연간 6억t의 물이 부족했다. 농민 입장에서 물 부족은 재난이다. (죽산보를 해체하자는 건) 물 부족 문제는 생각하지 않고 물그릇을 깨자는 것이다.” -김창원, 영산강뱃길연구소장
 
“죽산보 건설 전에도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자주 홍수 피해를 보았던 마을도 40여 년 전 집단 이주했고, 이후 큰 홍수도 없었다. 홍수 예방 차원으로 죽산보를 해체하지 말자는 건 이해할 수 없다.” -이종행, 죽산보 인근 농민
 
2009년 이명박 정부가 4대 강 보 건설 때 벌어졌던 찬반 논란이 10년 세월을 넘어 재연되고 있다. 
 
지난달 22일 환경부 4대 강 조사·평가 기획위원회(이하 기획위)가 보 처리 방안을 치밀한 준비 없이 내놓은 탓이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죽산보 하류에서 운행중인 황포돛배. 주민들은 환경부 제안대로 죽산보를 해체할 경우 황포돛배의 운항이 어려워지고, 관광객도 줄어들 것을 염려한다. 프리랜서 장정필

전남 나주시 다시면 죽산보 하류에서 운행중인 황포돛배. 주민들은 환경부 제안대로 죽산보를 해체할 경우 황포돛배의 운항이 어려워지고, 관광객도 줄어들 것을 염려한다. 프리랜서 장정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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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부가 금강·영산강 5개 보 중 금강 세종보와 공주보, 영산강 죽산보는 해체하는 게 바람직하고, 금강 백제보와 영산강 승촌보는 수문을 상시 개방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제시하자 각 보 인근 주민들은 즉각 찬반이 갈렸다.

 
부실한 발표가 주민 갈등으로 이어져
지난 13일 전남 나주시민회관에서 죽산보 등 영산강 보(洑) 처리방안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일부 주민들은 '죽산보를 지키자'는 내용의 펼침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3일 전남 나주시민회관에서 죽산보 등 영산강 보(洑) 처리방안에 대한 토론회가 열렸다. 일부 주민들은 '죽산보를 지키자'는 내용의 펼침막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전남 나주시 주민 최용기(59)씨는 “유지관리비를 아끼겠다고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지은 보를 그냥 부수는 게 말이 되느냐”며 “보는 기본적으로 수자원 확보 차원에서 필요한데, 녹조 등 환경오염이 우려된다면 여름철 기온이 올라갈 때만 개방하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죽산보와 매우 근접한 곳에서 농사를 짓는 유재창(54·나주시 다시면)씨는 “보가 생긴 이후 주변 땅이 침하해 농기계를 이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보 해체에 찬성 입장을 나타냈다.
  
낙동강 농민·어민 벌써 걱정
창녕함안보 인근인 경남 창녕군 길곡면 낙동강변에 수문 개방에 반대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낙동강에 대한 보 처리 방안이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주민들은 벌써부터 해체나 상시 개방 방안이 제시될까 걱정을 하고 있다. 위성욱 기자

창녕함안보 인근인 경남 창녕군 길곡면 낙동강변에 수문 개방에 반대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낙동강에 대한 보 처리 방안이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주민들은 벌써부터 해체나 상시 개방 방안이 제시될까 걱정을 하고 있다. 위성욱 기자

아직 보의 처리 방안이 나오지 않은 낙동강 인근 주민들 사이에서는 기대보다 우려가 더 크다.  
  
지난 15일 찾은 경남 창녕함안보 인근 도로에는 창녕군 길곡면 이장단협의회 이름으로 ‘길곡 농민 생존권 위협하는 창녕 함안보 수문 개방 절대 반대’라는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곳과 상류 합천창녕보 인근에는 낙동강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농민들, 특히 수막(水幕)재배를 하는 농민들은 보 철거나 상시 개방에 민감하다. 
 
수막재배는 비닐하우스를 두 겹으로 덮고, 비닐 사이에 16도쯤 되는 지하수를 뿌려 겨울철에도 농작물이 얼어 죽지 않게 하고 난방비를 절약하는 것을 말한다.
  
경남 합천군 청덕면 광암들 비닐하우스 단지에서는 2017년 창녕함안보와 합천보가 임시로 수문을 열면서 큰 피해를 보기도 했다. 
 
당시 이 모(49)씨는 8개 동(6600㎡)의 비닐하우스에서 기르던 양상추 대부분이 얼어 못쓰게 됐다. 이 일대 46개 농가의 양상추 비닐하우스(약 36만5000㎡)도 비슷한 피해(15억원 상당)를 봤다. 
 
이씨는 “보를 개방하면서 지하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아 대부분 냉해 피해를 봤다”고 말했다.
경남 합천군 청덕면 광암들. 낙동강변에 위치한 비닐하우스 농가에서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난방에 사용하는 수막재배를 하고 있다. 위성욱 기자

경남 합천군 청덕면 광암들. 낙동강변에 위치한 비닐하우스 농가에서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난방에 사용하는 수막재배를 하고 있다. 위성욱 기자

합천군 광암들 비닐하우스에서 농민이 재배 중인 양상추를 살펴보고 있다. 지하수를 활용해 수막재배를 하는 농민들은 보 수문을 개방할 경우 지하수위가 내려가면서 농사에 지장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위성욱 기자

합천군 광암들 비닐하우스에서 농민이 재배 중인 양상추를 살펴보고 있다. 지하수를 활용해 수막재배를 하는 농민들은 보 수문을 개방할 경우 지하수위가 내려가면서 농사에 지장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위성욱 기자

어민들도 생존권이 걸린 문제여서 관심이 많다. 합천보~창녕함안보 구간의 어민은 모두 21명이다. 보가 생기기 전에는 장어·동자개(빠가사리)·붕어·잉어·메기 등 다양한 어종이 잡혔는데, 보가 생기면서 물고기가 눈에 띄게 줄었다. 2017년부터는 보 수문을 자주 여는 바람에 유속이 빨라지면서 어구가 떠내려가는 피해도 보고 있다.
  
어민 성모(61)씨는 “강을 파내 모래톱이 다 없어져 직선화됐는데 이제 와서 다시 해체나 상시 개방하면 유속이 빨라져 안 그래도 없는 물고기를 더 잡을 수가 없을 것”이라며 “어민들이 어떤 피해를 보고 있는지 제대로 조사해 대안을 세운 뒤에 해체나 상시 개방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어민 이모(51)씨는 “무슨 일을 하든 당사자들의 의견 수렴이 제일 중요한데 4대 강 지을 때도 그렇고, 해체할 때도 그렇고 우리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나 했는지 의문이다”며 “그대로 두든, 해체하든 농민이나 어민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결정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민 여론 제대로 반영 안 돼
창녕함안보 인근 낙동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그물 등 어구를 살펴보고 있다. 농민과 어민들은 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지만 환경부 여론조사에서는 제대로 이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성욱 기자

창녕함안보 인근 낙동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그물 등 어구를 살펴보고 있다. 농민과 어민들은 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지만 환경부 여론조사에서는 제대로 이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성욱 기자

실제로 이번 환경부 발표에 대해 여론이 제대로 반영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환경부 기획위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강물 이용 비율이 높은 농림어업 종사자의 절반 이상이 ‘보가 필요하다’고 답했지만, 당시에는 상세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

기획위의 ‘보에 대한 인식과 선호 설문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일반 국민 1000명 전체로는 44.3%가 ‘보가 필요하다’고 답했고, 36.9%는 ‘보가 필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농림어업 종사자 60명만 보면 60.1%가 ‘보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은 26%에 그쳤다.

 
조명래 환경부 장관은 지난 12일 국회 토론회에 참석해 “여론조사를 하기는 했지만 조사 방법론에 근거했기 때문에 주민의 대표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고, 지역별·장소별·보별 주민 의견을 듣지 못했다”며 “협의체 관계자뿐 아니라 지역 관계자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만나서 의견을 듣고 보완할 점은 보완하겠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김방현·위성욱·김호·천권필·백희연 기자, 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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