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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김정은의 꼼수, 트럼프의 시간

중앙일보 2019.03.20 00:12 종합 31면 지면보기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정은의 꼼수, 트럼프의 시간.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을 복기하는 키워드다. 북한은 실무회담을 최소화해 자신들의 안을 미국이 알기 어렵게 만든 다음 정상회담에서 담판을 지으려는 수를 택했다. 1차 정상회담 후 올해 초까지 6개월 이상 실무회담을 회피한 대신 신년사나 친서를 통해 정상회담에만 공을 들였다. 까다로운 실무협상가보다 얼렁뚱땅 같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상대할 때 꼼수가 훨씬 잘 통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협상 결렬 후 북한 리용호의 기자회견은 그 꼼수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에 엄청난 바가지를 씌워 2016년 이후의 유엔안보리 제재 해제와 맞바꾸려 했다. 유엔안보리 제재 11개 중 5개, 그것도 민수(民需) 경제와 관련된 것만 풀어달라는 것이니 오히려 미국에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풀어달라던 제재야말로 실효성이 있는 것이었고 나머지는 유명무실했다. 더욱이 2016년 초에 채택된 제재는 민생용 석탄 수출을 허용했기 때문에 무용지물이 됐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북한이 트럼프를 상대로 ‘봉이 김선달’ 작전을 시도한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이런 시도를 예상했던 것 같다. 올해 초 2차 정상회담이 거론되자 김영철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는 협상안도 없이 제재 해제만을 집요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그 후 스티븐 비건 미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동시·병행적으로’ 비핵화 관련 조치를 할 수 있다고 북한 입장에 한 발 더 다가가 협상안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이후의 평양 방문에서도 별 소득이 없자 미국은 협상 결렬을 하나의 안으로 준비한 것으로 짐작된다. 미 관료들은 보고서를 싫어하는 대통령을 위해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라고 주지시켰고 ‘서두르지 마세요’를 반복했을 것이다. 하노이에서 북한의 꼼수를 확인한 미국은 빅딜로 응수했지만 북한은 거부했다. 회담에 동행한 미 관료에 따르면 이 상황에서 여러 부처가 합의해 결렬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번 협상 결렬의 긍정적 효과도 있다. 매물과 상대의 호가를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다는 점이다. 제재 해제를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 대가로 봤지만 미국은 단번의 완전 비핵화 가격으로 본 것이다. 앞으로 당분간 북·미 모두 이 호가를 바꿀 생각이 없다는 ‘빈 말’을 되풀이 할 것이다. 북한은 거친 말과 몸짓까지 동원할 수 있다.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복구 움직임이나 지난 주말 최선희의 비핵화 협상 중단 고려 발언이 그 예다. 미국이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김정은의 올해 신년사 내용이 더 공격적인 어조로 바뀔 수도 있다.
 
김정은이 비핵화 협상을 깨고 핵과 미사일 도발이라는 ‘새롭지 않은 예전 길’을 가기엔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 크다. 그동안 쌓은 국제 정치가의 이미지는 무너지고 대신 세계를 우롱한 국제 사기꾼으로 전락할 수 있다. 2017년 말보다도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수 있다. 북한 내부를 추스르는 것도 큰 문제다. 협상에 실패한 지도자로 그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은 기본이다. 또 제재 해제 없이 경제가 살아날 수 없으며 경제 회생 없인 그의 권력은 풍전등화 같을 것이다. 싫든 좋든 김정은이 협상 트랙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집을 비싸게 팔고 싶은 사람도 시장 상황이 나빠지면 할 수 없이 호가를 낮춰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정은의 핵 매도 호가가 떨어지려면 제재 충격이 더 축적돼야 한다. 제재의 총 효과는 ‘강도(强度)×기간’이다. 필자의 제재 실효성 지수에 따르면 작년 하반기의 제재 효과는 100점 만점에 57점이었다. 학점으로 치면 B 정도다. 제재가 본격화 된 2017년 3월부터 2년이란 시간이 지난 지금 북한에선 무역 급감 뿐 아니라 대도시 아파트 값 폭락 등 제재 충격 증상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정확한 통계를 만들지 못하고 경제 지식도 얕아서 처음엔 제재 효과가 있을 줄 몰랐다. 지금도 외환이 얼마나 빨리 감소하는지 알지 못하고 가계 소득 추이도 추정할 수 없다. 그래서 더 불안할 것이다. 이것이 하노이 회담에서 김정은이 ‘우리에겐 시간이 없다’고 되뇌인 이유일 수 있다.
 
협상은 시끄러운 냉각기를 거친 다음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에 우리 정부는 미국과 남북경협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기보다 북한 내부 변화에 관한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최근 미국이 북한 경제 변화 등을 열심히 학습하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 결과 미국 스스로 경협을 위시한 북한 개발 계획을 비핵화 로드맵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제재 강도가 지속돼야 경협의 기회가 더 빨리 올 수 있다. 우리가 앞장서 그 강도를 낮춘다면 북한의 핵 매도 호가가 떨어질 때까지 시간만 더 걸릴 뿐이다.
 
김정은의 꼼수가 트럼프의 시간에 막혀 있는 지금 문재인 정부의 경협 고집은 오히려 꼼수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평화가 경제’인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핵을 쥔 정권에게 평화 조공을 바치며 살아야 할지 모른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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