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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 “1등은 왜 꼭 한 명이어야 하나…사다리 안 올라도 행복해야”

“1등은 왜 꼭 한 명이어야 하나…사다리 안 올라도 행복해야”

중앙일보 2019.03.19 05:00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2009~2010년 인기를 끌었던 KBS ‘개그콘서트’의 유행어(개그맨 박성광)다. 무한경쟁의 한국 사회에 대한 자조이기도 했다. 10대 아이들이 중심인 교육 현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종 시험 성적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입시제도 하에서 한국의 ‘교실’은 병들어 갔다. 아이는 공부를 포기했고, 부모는 더 좋은 학군을 찾아 짐을 쌌다. 교사가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동안 학원은 ‘공포’를 불어넣었다. 중앙일보 탐사보도팀이 ‘교실이데아 2019’ 취재 과정에서 목격한 2019년 교실의 현주소다. 유행어가 나온 뒤 약 10년이 지났지만, 적어도 교실에서는 ‘구문(舊文)’이 아니었다.
 
시험 성적으로 줄 세우는 입시제도 속에서 교실은 점점 병들어 갔다. [일러스트=박향미]

시험 성적으로 줄 세우는 입시제도 속에서 교실은 점점 병들어 갔다. [일러스트=박향미]

취재에 응한 교육·복지·정신건강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의 획일성이 교육에 투영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계층 상승의 욕구가 만든, ‘교육 사다리’의 정점만을 향해 올라가려는 사회 분위기를 꼬집은 말이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한국의 중산층 부모들은 교육 투자라도 하지 않으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일종의 ‘도박’을 하는 셈”이라며 “‘교육 사다리’가 없어졌다고들 하는데, 사다리를 타지 않더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신과 전문의인 김현수 성장학교 ‘별’ 교장도 “1등이 한 명밖에 없도록 만드니까 교육 현장에서 동기 부여가 되지 않는 것”이라며 “공부해서 시험을 잘 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다중 지능’의 개념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선 제도권 교육이 아이들의 각기 다른 재능을 끌어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성적으로만 1등이 아니라 다양한 기준의 1등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얘기다. 송형호 전 면목고 교사는 “영어 성적이 최하위권인 학생에게 영어단어를 그림으로 표현하게 하니 학습교재로 써도 될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런 아이가 애니메이션 학교에 가면 전교 1등”이라며 “‘지식 전달자’로서의 교사의 권위를 버리고, 아이가 잘하는 것을 끄집어내 자존감을 키워주는 ‘디자이너’가 돼야 할 때”라고 말했다. 심정섭 더나음연구소 소장은 “모두가 국·영·수에 ‘올인(All-in)’하는 게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잘하는 걸 더 잘하게 만드는 게 교육”이라며 “사교육도 웹툰을 좋아하면 미술 학원을, 드론을 좋아하면 드론 학원을, 뷰티에 관심이 있으면 미용 학원을 보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공부 외의 대안을 마련하는 건 결국 국가의 몫이라는 견해도 있었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면 성공할 수 있다’는 공식만을 경험한 현재 부모 세대에게만 맡겨 놓는 건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김동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공부하지 않겠다는 아이들에게는 무엇을 가르칠지 고민해야 하는데, 아무도 그 얘기를 하지 않는다”며 “부모에게만 맡겨둘 게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가보지 않은 길’의 기반을 닦아 주는 게 선진화된 사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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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과정에서 마음의 병을 앓는 아이들을 위해선 무엇보다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홍현주 한림대 ‘자살과 학생 정신건강 연구소’ 소장은 “부모들이 교육에 몰두하는 이유는 ‘이 길이 아니면 정말 아니다’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던 세대이기 때문이지만, 아이들은 이런 식의 공부를 한다고 해서 최상위가 될 수 없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다”며 “그걸 인정하고 이해할 때 부모·자녀 사이의 실질적인 대화가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전상용 전 동덕여고 교장은 “부모는 최초의 교육자”라며 “교육에 대한 지식을 키우기 위한 ‘부모로서의 소양 교육’을 이수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탐사보도팀=유지혜·정진우·하준호 기자 wisepe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교실이데아 2019] 학부모 선호도 높은 초등학교, 서울대 진학률이 높은 고등학교를 인포그래픽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news.joins.com/article/23410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