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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 39명 중 38등→예비 공학박사…‘답 없던’ 그를 바꾼 한가지

39명 중 38등→예비 공학박사…‘답 없던’ 그를 바꾼 한가지

중앙일보 2019.03.19 01:30 종합 4면 지면보기
한국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한 번 넘어진 아이들은 인생의 패자가 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아프게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나는 ‘성공의 경험’이 갖는 힘은 크다. 이를 등대 삼아 길을 찾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교실 이데아’ 속의 작은 희망이다. 
 
# 1.
참 귀찮은 선생님이었다. 관심을 끌지 않도록 적당히 하자는 게 학교 수업에 임하는 자세였는데 이번 담임은 계속 와서 “그래서 넌 뭘 잘해?” “넌 하고 싶은 게 뭐야?”라고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질문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전 영상 가지고 노는 거 좋아해요. 편집도 좀 하고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더 귀찮게 했다. “그럼 영상으로 영어 수업 교재를 만들어 보지 않을래?”
 
‘대체 이런 걸 왜 시켜’라는 생각도 잠시, 막상 시작하니 아이디어가 솟았다. 좋아하던 스타크래프트 게임 영상을 활용해 교재를 만들었다. 선생님은 약속대로 영상을 수업 교재로 썼다. 화면을 처음 틀었을 때는 손발이 오글거려서 쳐다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갑자기 반 친구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야, 윤성호! 이거 진짜 네가 만든 거야? 장난 아닌데?”
 
중2 때 사제지간으로 만나 서로의 인생을 바꾼 손지선 교사(35·오른쪽)와 윤성호(24)씨. 지난 4일 손 교사의 현 근무지인 서울 양천구 양서중에서 사제가 재회했다. 오종택 기자

중2 때 사제지간으로 만나 서로의 인생을 바꾼 손지선 교사(35·오른쪽)와 윤성호(24)씨. 지난 4일 손 교사의 현 근무지인 서울 양천구 양서중에서 사제가 재회했다. 오종택 기자

게임 전문 마케팅 회사 ‘디앤엠’에서 영상 구현·편집을 맡고 있는 윤성호(24)씨의 ‘영상 인생’은 10년 전 이렇게 시작됐다. 윤씨는 중학교 2학년이던 당시를 떠올리며 “잘한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이것저것 만들어 학교에 가져가서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피드백을 받았고, 그럴수록 직업으로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윤씨는 교실과 공부로 인한 상처가 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학원 강사 때문이었다. 윤씨는 “문제를 못 풀었다고 학원 선생님이 내 멱살을 잡고 밀치고, 지켜보던 친구들은 한 마디도 못한 채 얼어 있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고 돌아봤다. 초등학생 때는 ‘개그맨 해도 되겠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그 뒤로는 교실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무서워졌다.
 
하지만 중2 때 ‘성공의 경험’이 윤씨를 바꿨다. 실력을 쌓기 위해 특성화고인 세명컴퓨터고에 진학했다. 거주지인 도봉구 창동에서 학교가 있는 은평구 불광동까지 통학에 지하철로 꼬박 왕복 세 시간이 걸렸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윤씨는 “내게는 고등학교 합격이 SKY 입학만큼 기뻤다”고 말했다. 그는 “‘특성화고는 공부 못 하는 아이들이 가는 곳’이란 시선을 잘 알기에 오히려 고졸이어도, 특성화고를 나왔어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곧바로 취업에 뛰어들었다”고 말했다.
 
첫 번째 직장 면접에서 윤씨는 중2 때 영상 교재 제작 경험을 이야기했고 채용됐다. 지금 다니는 디앤엠은 세 번째 직장이다. 윤씨의 연봉은 대졸 신입사원 초봉 평균과 큰 차이가 없다. 그의 직장 상사인 김남규 디앤엠 스마트사업부 본부장은 윤씨에 대해 "실제 사회에 나왔을 때 경력이 학력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사회 변화를 고려하면 기술을 보유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갈 수록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윤씨는 대학 진학을 원하는 부모에게 “대학 졸업장은 필요할 때 따러 가겠다”고 말했다. 실제 윤씨는 경력을 더 쌓은 뒤 유학 가는 방안을 생각 중이다.
 
윤씨에게 성공의 경험을 만들어준 중2 때 담임 교사 손지선(35)씨는 “성호를 만나 오히려 내가 깨달음을 얻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학생을 평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성호 덕에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어떤 학생이든 지금이 아니라도 좋아질 수 있다고 믿고 기다려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중2 때 사제지간인 손지선 교사(35·오른쪽)와 윤성호(24)씨가 지난 4일 손 교사의 현 근무지인 서울 양천구 양서중에서 만났다. 오종택 기자

중2 때 사제지간인 손지선 교사(35·오른쪽)와 윤성호(24)씨가 지난 4일 손 교사의 현 근무지인 서울 양천구 양서중에서 만났다. 오종택 기자

손씨의 또 다른 제자 황예영(19)군도 이런 믿음과 기다림에 응답한 경우였다. 노원구 중계동에서 학교에 다닌 예영이는 “다닌 학원 숫자만 보면 전교 1등을 해야 할 정도였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 버릇이 안 들어 그런지 점수가 오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하기도 싫었다”고 돌아봤다. “그때 나에게 교실은 ‘갇혀 있는 공간’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수업시간에는 자고, 점심시간에는 축구를 하며 학교에서 시간을 보냈다”고도 했다.
 
그러다 중3 때 담임으로 손씨를 만났다. 당시 예영이의 성적은 최하위권이었다. 예영이는 “고등학교도 못 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성적이 바닥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혼내기는커녕 차근차근 공부법을 가르쳐 주셨다”고 말했다. 또 “몇 점만 점수가 올라도 ‘노력하니까 이렇게 성과가 나고 있다’고 칭찬을 받았다. ‘포기하지 않는 것’의 의미를 그때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예영이는 “중3 때 처음으로 담임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영어 수업 시간에 필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공부 습관을 들이다 보니 학교와 학원에서 흡수하는 학습량 자체가 달라졌다. 고등학교 첫 반 배정 시험에서 1~13반 중 3반에 들어갔다. 지금껏 받아본 적 없는 점수에 예영이는 더욱 고무됐다. 3년이 지난 올해, 예영이는 원하던 성서대 성서학과에 합격했다.
 
손씨는 ‘중학교 내신 95%에서 인서울 대학에 진학한 기적의 선배’라며 예영이 이야기를 다른 학생들에게 해주곤 한다. 그는 “선생님이 자신을 포기한다는 사실은 아이들이 가장 먼저 안다. 조그마한 칭찬 거리라도 찾기 위해 교사는 항상 관찰력이 좋아야 한다”고 말했다.
 

# 2.  
어린 기준(가명)이는 겁이 없었다. 형들의 옷이어도 마음에 들면 그냥 가져왔다. 훔친 옷인데도 버젓이 입고 돌아다녔다. 부모님에게 혼나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을 보면 못살게 굴었다. ‘이러면 또 혼날 텐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 상가 앞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에 손을 댔다가 경찰서까지 가게 됐다. 그렇게 바닥을 향해 가나 싶었다. 하지만 자전거 절도를 계기로 한 경찰관을 만나면서 기준이의 인생이 달라졌다. 현재 올림픽 채택 종목의 고교 선수로 뛰고 있는 김기준(18)군의 이야기다.
 
기준이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건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기준이네 부모님은 지방에서 요식업을 크게 했다. 건물을 살 정도로 번창하자 기준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엔 가족 모두 서울 강남으로 이사했다.
 
기준이 아버지(51)는 “사업이 커질수록 나와 아내는 밖에서 일하느라 아이들에게 신경 쓸 시간이 줄었고, 미안하니까 한 번씩 원하는 선물을 사주거나 원하는 곳에 데려가 주는 식으로 크게 크게 보상을 해줬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말로 그러면 안 된다고 해도 기준이가 물질적 부분에 대해서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됐던 것 같다”고 돌아봤다. 기준이도 “갖고 싶으면 빼앗으면 되고, ‘내가 이걸 가져오면 그 사람은 또 다른 걸 사겠지’라며 단순하고 철없이 생각했다. 내가 하는 행동의 결과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중1 때 ‘강남 사교육’을 받으면서 기준이의 반발심은 더 커졌다. 기준이는 “공부는 쳐다도 보기 싫은데 부모님은 계속 과외 선생님을 붙여서 하라고 하니까 ‘그래, 누가 이기나 해보자. 아무리 시켜도 난 절대 안 해’라는 마음이 생겼다. 그럴수록 ‘다른 건 내 마음대로 하자’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자전거 사건으로 만난 경찰관은 문제 행동 청소년 지도를 10년 이상 해온 전문가였다. (※해당 경찰관은 현재 멘토링 중인 다른 청소년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 신원 공개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이 경찰관은 “기준이는 마음에 화가 많이 쌓인 상태라 먼저 이것부터 풀 필요가 있었다. 단둘이 자전거를 타고 춘천까지 두세 번 오가면서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대화를 계속하며 화를 풀 통로가 뭐가 있을지 고민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그러다 우연히 기준이가 운동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본격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연결해줬다”고 말했다.
 
기준이는 “운동에 타고났다는 평가를 받고 ‘지금까지 해놓은 게 없는데 이것 하나만은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말했다. 기준이는 금세 실력을 인정받았다. 지난해에는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따기도 했다.
 
기준이만 변한 게 아니었다. 기준이 아버지는 “멘토 경찰로부터 부모가 아이들 시선에 맞춰 대화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나도 모르게 자꾸 강요하고, 주입하고, 간섭하고, 아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말하기보다 들어주고, 채근하기보다 기다려주고, 기준이의 결정을 존중해주는 법을 배우고 있다.
 
요즘 기준이의 생각이다. “모든 일과 생각에는 때가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전에 내가 했던 행동들이 얼마나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지금도 내 진로가 완전히 정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게 더 잘 맞는 일을 하게 되는 때가 올 수도 있다. 지금으로선 최선을 다하면 계속 길이 생길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때가 왔을 때 준비돼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기준이는 그렇게 하기 싫어했던 영어 공부를 지금은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 3.
39명 중 38등, 주요 과목 8등급, 결석 및 무단 결과 약 70개. 화려한 고2 학교생활기록부의 주인공은 지금은 최상위권 대학원에서 공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김승환(27·가명)씨다.
 
김씨는 “중3 때 선생님이 ‘넌 답이 없어’ ‘넌 커서 범죄자나 될 거야’라는 악담을 서슴지 않았다. 학교는 점점 멀어졌다”며 “주변에서 아무도 공부를 안 하니, 내가 공부를 안 하는 것도 별로 특이한 게 아니었다”고 말했다.
 
갈수록 수업을 빼먹고 PC방에 가서 게임을 하는 날이 많아졌다. 게임중독으로 결석률이 정점에 달했던 고2 1학기. 여느 때처럼 PC방에 있는데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승환아, PC방이니? 어차피 학교 안 올 거면 같이 등산이나 갈까?”
 
같이 산에 오르면서도 혼내지 않았다. 대신 “요새 무슨 게임 하니?” “좋아하는 게 뭐야?”라고 물었다. 마음이 편해지니 “컴퓨터 하는 것 좋아해서 초등학교 때 자격증도 땄어요”라는 이야기를 하게 됐다. 그러자 다음 주, 선생님은 자신이 발행하는 학급 신문에 ‘컴퓨터 실력자 승환이’를 소개한 기사를 실었다.
 
학교 뒷산에 오른 중학생들의 모습. [중앙포토]

학교 뒷산에 오른 중학생들의 모습. [중앙포토]

처음에는 이런 관심이 낯설었다. 조금 지나자 왜 그러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다 ‘이런 관심을 받는다면 학교생활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아무리 학교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학교에서 나를 완전히 무시한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였을 거다. 하지만 선생님은 컴퓨터만 잘해도 갈 수 있는 대학 등 다양한 선택지를 알려주며 ‘승환아, 우리 해보자’ ‘가보자’라는 말씀을 계속해주셨다. 이렇게 관심을 받는데 난 뭘 할 수 있을지를 처음 고민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내가 되고 싶은 어른의 모습이 그려졌고, 지금처럼 살면 그런 어른은 절대 될 수 없다고 결론을 냈다. 이후 친구, 게임, 휴대전화 다 끊고 독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3학년 진급 여부도 불확실했던 상습 지각생은 1년 뒤 학급 모범상을 탔고, 재수를 거쳐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다. 김씨는 “제대로 한 번 해보자는 결정을 내린 것은 나지만 ‘아, 이건 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 자체가 선생님의 관심이었다”며 “관심을 보여주는 좋은 선생님이 있다면, 시간이 걸려도 누구든 달라질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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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의 인생을 바꾼 선생님은 경력 35년의 교사 송형호씨다. 송씨는 학력 부진 학생을 지도하는 데 교직 경력의 대부분을 바쳤다. 그는 “아이가 잘하는 것을 끄집어내서 공유하고 ‘나도 이 학교의 학생’이라는 소속감과 자존감을 키워주면, 어느 하나에서만 힘을 받아도 그 힘이 곧 그 아이의 모든 에너지가 된다”고 말했다. 그는 “작은 변화를 인정받으면 그때부터 아이들은 달라진다. 인정의 기준은 남과의 비교가 아니라 그 아이의 현재”라고 말했다.
 
탐사보도팀=유지혜·정진우·하준호 기자 wisepe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교실이데아 2019] 학부모 선호도 높은 초등학교, 서울대 진학률이 높은 고등학교를 인포그래픽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news.joins.com/article/23410238)
도움 말씀 주신 분(가나다순)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김동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김수동 심리치료사, 김용학 연세대 총장, 김현수 성장학교 ‘별’ 교장(정신과 전문의), 박민규 고려대 통계학과 교수, 방승호 아현정보산업고등학교 교장, 변수용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부교수,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송형호 전 면목고 교사,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심정섭 더나음연구소장,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 오세정 서울대 총장, 장희선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연구소 연구원(사회복지학 박사), 전상용 전 동덕여고 교장, 최성수 성균관대 사회학과 조교수, 홍현주 한림대의대 ‘자살과 학생 정신건강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