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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인사이트] 베이징의 스모그는 트럼프 대통령 얼굴을 닮았나

중앙일보 2019.03.19 00:04 종합 26면 지면보기
베이징 봄 앗아간 미·중 무역전쟁
베이징 봄 공기가 무겁다. 시도 때도 없는 스모그가 해를 가리면 우울하다. 거리 곳곳에 만연한 담배연기는 고문이다. 규정에 따라 16일부터 난방이 끊기면서는 으슬으슬 추위에 떤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그러나 정작 베이징 봄의 화사함을 앗아간 범인은 따로 있다. 미·중 무역전쟁이다. 그 파장이 중국의 어깨를 꽉 누르고 있는 모양새다. 오죽하면 “베이징 스모그가 심술궂은 트럼프 얼굴을 닮았다”는 말이 나올까. 어떻게 하루빨리 미국과 타협하나, 중국은 어디서 돌파구를 찾아야 하나. 베이징에서 만난 중국 인사들의 고민은 온통 미국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에 맞춰져 있었다.
  
매년 3월 열리는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는 중국의 정치 축제와 같다. 올해도 의회격인 전국인대(全國人大)의 3000여 대표와 자문기구 성격의 정협(政協) 대표 2000여 명이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 모였다.
 
물론 진행은 공산당 기획대로 흘러간다. 그래서 인대는 당의 방침을 추인만 하는 기구란 뜻에서 ‘고무도장(橡皮圖章)’, 정협은 행사 들러리란 의미의 ‘정치꽃병(政治花甁)’이란 별명이 붙었다. 인대가 찬성의 손을 들면 정협은 박수를 친다는 비아냥도 나온다.
 
그렇다면 나흘 전 폐막한 올해 양회를 통해 중국 공산당이 얻고자 했던 건 무얼까. 한마디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환심 사기였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민생 운운한 중국 언론엔 미안한 말이지만 말이다.
 
중국의 대미전략

중국의 대미전략

우선 중국 굴기를 뜻하는 ‘중국 제조 2025’란 말이 사라졌다. ‘제조 대국’에서 ‘제조 강국’으로 올라서겠다는 구호가 자취를 감춘 것이다.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지난 5년간 늘 자랑스럽게 들먹이던 중국이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 중국이 세계 경제에 얼마나 공헌하는가 등의 말도 없어졌다.
 
의도는 분명하다. 중국의 부상을 선전하다 행여 트럼프 대통령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 염려한 탓이다. 어디 그뿐이랴. 중국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뜻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군사비 증가율도 낮췄다. 올해 중국의 국방비는 지난해보다 7.5% 늘어난 1조1900억 위안으로 책정됐다. 당초 9%대 증가율이 예상됐으나 막판 하향 조정했다는 후문이다. 이는 지난해 증가율 8.1%에도 못 미친다. 중국 당국의 속내를 곧잘 대변하는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중국 국방비가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라지만 중국의 군사력 또한 세계 2위인가”란 개탄조의 글을 실었다. 아직 멀었다는 것으로 ‘미국이여! 염려 놓으시라’는 뜻이다.
 
올해 양회에선 또 ‘외상투자법’을 통과시켰다. 역시 트럼프 대통령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다. 외상투자법엔 “중국 당국이 행정수단을 이용해 외자기업의 기술 이전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중국에 진출한 외자 기업을 상대로 중국 기업에 기술을 이전하라고 강제하는 건 그동안 그 부당성 논란과 함께 미·중 갈등의 중요한 내용을 이뤄왔다. 이제는 이를 법으로 막겠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강(易綱) 중국인민은행 총재는 양회 기간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위안화를 절대로 평가 절하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위안화 평가 절하 문제는 미국이 꾸준히 제기해온 문제다. 이강 총재의 말은 중국이 인위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낮춰 자국 수출기업에 유리한 환경을 만드는 한편 미국의 추가 관세 부과 효과를 상쇄하는 측면이 있다는 미국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향후 그런 일이 없을 것임을 약속한 것과 같다.
 
베이징에선 이제 미국이 요구하는 내용 대부분을 사실상 중국이 백기를 들고 양보한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그럼에도 당초 오는 27일 트럼프 대통령의 별장 마라라고 리조트에서 열기로 했던 미·중 정상회담 취소 이야기는 왜 나왔나. 시진핑 주석이 실무 차원에서 협의가 끝난 문건에 서명만 하는 정상 간 만남을 바라는 데 반해 트럼프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시 주석과 만나 단둘만의 ‘거래’를 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트럼프는 무슨 ‘딜’을 하려는 걸까. 베이징 소식통은 “중국이 약속한 내용을 미국이 어떻게 검증하느냐의 방법을 둘러싸고 의견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약속만 해놓고 정작 실행에선 구멍이 숭숭 뚫리는 게 아니냐는 게 미국의 우려다. 반면 중국으로선 미국이 검증을 내세워 중국 곳곳을 뒤지겠다는 게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은 또 미국의 속내가 중국의 굴기를 막는 데 있는 만큼 미국의 압박이 갈수록 거세질 것으로 걱정한다.
 
그럼 중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최근 눈에 띄는 중국의 행보는 두 갈래다. 하나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다. 역사 인식문제와 댜오위다오(釣魚島) 영유권 분쟁을 뒤로하고 지난해부터 중·일 관계는 빠르게 회복 중이다. 왕이(王毅)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은 양회 기간 일본 기자의 질문을 받자 “중·일 관계 질문이 회견 말미에 나온 건 양국 관계가 이미 안정 방향에 들어섰음을 말한다”고 답했다. 양국 사이에 훈풍이 분다는 것이다. 그 이유와 관련해 중국에선 트럼프 변덕에 놀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나름대로 독자 노선을 추구한 결과라 풀이한다. 하나 박수가 한 손으로 소리가 나나. 중국이 적극 호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속내인가. 미국이 일본과 인도, 호주를 끌어들여 중국을 포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서 벗어나려면 그 축을 무너뜨려야 하는 바 일본과 계속 척을 지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의 하이테크 기술을 얻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일본에 관심을 보내는 측면도 크다. 중·일 관계 개선은 실제 협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 육상 및 해상실크로드) 프로젝트에서다. 두 나라가 손잡고 태국 고속철 건설 사업에 나서는 것이다. 일대일로 관련해 중국과 이렇다 할 협력 사업을 찾지 못하고 있는 우리로선 마음이 편치 않다.
 
중국의 또 다른 행보는 유럽 공략이다. 미국의 소나기 공세를 피하기 위해 중국은 유럽 국가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런 노력이 통했는지 최근 독일과 영국, 이탈리아가 화웨이(華爲) 장비 사용 제한을 요구하는 미국과의 공조 대열에서 이탈 조짐을 보인다. 시 주석은 오는 22일 서방 선진 7개 국가 중에선 처음으로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 의사를 밝히고 있는 이탈리아 방문에 나선다. 과거 중국 주도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성공시키기 위해 영국의 참여를 먼저 유도했던 책략과 흡사하다. 당시 영국이 참여를 선언하자 세계 각국이 더 이상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AIIB 참여 물결에 동참했던 전례가 있다. 서방 주요국 한 곳을 허물면 미국과의 연대에 균열이 생길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중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강공에 실력 차를 절감하면서 납작 엎드린 모습이다. 안쓰러울 정도다. 일각에선 중국을 비웃을 수도 있겠다. 하나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란 위안이 나온다. 숙여야 할 때 숙이는 건 부끄럽지 않다는 것이다. 베이징의 한 중국 지인은 “중국이 만일 러시아, 독일과 함께 삼국 협력을 이뤄낼 수만 있다면 미국이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을 연상시키는 말에 깜짝 놀랐다. 그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라도 중국이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번 무역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중국은 싸움은 이제 시작이란 생각이다. 앞으로 펼쳐질 수많은 전투를 통해 열세이던 자리를 조금씩 우세의 위치로 바꿔가면 된다는 계산이 중국엔 팽배해 있는 듯하다.
 
유상철 베이징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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