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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 알고 읽어도 좋다, 읽는 재미 가득한 이 추리소설

중앙일보 2019.03.18 15:00
[더,오래] 김성희의 천일서화(28)
유럽의 어느 영화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들었다. 한 관객이 안내양의 도움을 받아 영화관에 늦게 입장했는데 팁을 주지 않자 그 관객의 귀에 대고 조용히 범인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사진은 서울 영등포의 한 영화관.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유럽의 어느 영화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들었다. 한 관객이 안내양의 도움을 받아 영화관에 늦게 입장했는데 팁을 주지 않자 그 관객의 귀에 대고 조용히 범인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사진은 서울 영등포의 한 영화관.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유럽의 어느 영화관에서 있었던 이야기라고 들었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한 관객이 늦게 입장했다. 어둠 속에서 안내양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찾았는데 관례와 달리 팁을 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랬더니만 안내양이 그 관객의 귀에 대고 살며시 “범인은 운전수예요”하고 속삭이더라나.
 
맞다. 작가는 독자의 허를 찌르려 반전을 준비하고 독자는 범인을 맞추려 읽는 내내 고심하는 것이 추리소설의 본래 미덕이다. 그러니 추리 영화의 결말을 알고 보면 영화 보는 재미가 반감된다. 그 안내양은 힘들이지 않은 작은 심술로 그 관객에게 보복한 셈이었다. 먼저 범죄를 보여주고 범인을 잡는 과정을 보여주는 도서(倒敍) 추리소설이나 범죄소설은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두 번 읽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 없는 법칙은 없는 법. 결말을 알고도, 그러니까 거듭 읽어도 재미있게 읽히는 추리소설이 있다. 내 기억으로는 『아기는 프로페셔널』(레니 에어드 지음, 동서문화사)가 그중 하나다. 
 
『아기는 프로페셔널』, 레니 에어드 지음, 서창근 옮김, 동서문화사.

『아기는 프로페셔널』, 레니 에어드 지음, 서창근 옮김, 동서문화사.

 
이게 얼마나 맘에 들었는가 하면, 이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고 싶어 아마존서점을 뒤졌을 정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아공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언론인 생활을 했다는 지은이는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는지 다른 작품은 찾지 못했다.
 
이 소설은 머리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원제 ‘유괴(snatch)’가 시사하듯 유괴 범죄의 전말을 시간순으로 풀어가니 말이다. 그런데 이게 꽤 유쾌하다. 용납하지 못할 유괴 이야기를 두고 이런 표현을 쓰자니 꺼림칙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유괴범은 조무래기 악당 4인조. 그리스, 영국, 탄지르 등에서 관광 안내 일을 하거나 소소한 범죄 행각을 벌이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여권위조 일을 하던 해리 블래이튼이 옛 동료 몰랜드를 만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몰랜드는 마지막으로 한탕 하자며 블래이튼을 압박하는데 그에게 ‘부채’가 있던 블래이튼은 마지못해 끌려들어 간다.
 
몰랜드의 계획은 베이루트에서 지브러올터까지 지중해 매춘업의 7할을 차지하고 있는 억만장자 악당 유스프 리파이의 아기를 유괴해 몸값을 받아내는 것. 목표는 25만 달러-소설이 출간된 1969년엔 이게 엄청난 금액이었던 모양이다-인데 여기에 리파이에 구원(舊怨)이 있던 베이루트의 댄서 출신 폴라, 리파이의 경호실장 하먼이 가담한다.
 
범죄를 위해 이탈리아에 간 이들은 생후 18개월 된 아기를 ‘임대’한다. “유괴한 아기는 (돌려줄 때까지) 땅속에 묻어둘 수도 없고, 은행 금고 속에 묻어둘 수도 없고, 역의 수하물 보관소에 맡겨둘 수도 없기” 때문에 미리 아이가 있는 척하다가 바꿔치기하기 위해서다.
 
범죄를 위해 이탈리아에 간 이들은 생후 18개월이 된 아기를 '임대'한다. [사진 pixabay]

범죄를 위해 이탈리아에 간 이들은 생후 18개월이 된 아기를 '임대'한다. [사진 pixabay]

 
알베르트라는 이 빌려온 아기가 ‘프로’다. “질질 울기만 하고, 병치레나 하는 그런 걱정이 절대로 없고” “단지 먹고 자고 똥오줌만 쌀 뿐 건방지게 주둥아리를 놀리지 않는” ‘모범 아기’다. 우여곡절 끝에 ‘프로’ 아기를 데려와 블래이튼과 폴라는 부부 행세를 한다. 그리고 리파이의 아기 셀림과 바꿔치기에 성공하는데 여기서부터 일이 꼬인다.
 
빽빽 울기만 하고 잔병치레나 하는 등 성가신 자기 아들에 질려 있던 리파이가 홀연 알베르트에 홀린 것이다. 해서 몸값을 주지 않고 셀림 대신 알베르트를 키우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이들 송사리 아마추어 악당들은 당황하는데….
 
소설은 명랑하고 따뜻하다. 범죄소설에 이런 평가는 썩 어울리진 않지만 살인은 한 장면도 안 나오고 해피엔딩이니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 게다가 블래이튼의 입장에서 일인칭으로 서술되는 이야기가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는 덕분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나는 하먼과 악수를 했다. 악수를 끝낸 내 손의 모양이 좀 변해 있었다(경호원인 하먼이 힘이 세서)”라든가 “여자라는 것을 안 것은 여자용 원피스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아기를 빌려준 이의 어머니가 억세 보여)” 하는 식이다.
 
‘명랑 범죄소설’의 원조라 할 이 작품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구하기가 아슬아슬하다는 것. 내가 가진 것은 79년 판인데 한동안 절판됐다가 2003년 새로 단장한 책이 나오긴 했지만 그 재미에 비해 덜 알려져 과연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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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필진

[김성희의 천일서화] 책생책사(冊生冊死). 책을 읽고 기자를 꿈꿨고, 출판팀장으로 기자 생활을 마무리했다.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핵심은 ‘재미’였다. 공연히 무게 잡는 책은 싫기도 하고 읽어낼 깜냥도 못 되었으니. 이 경험을 바탕으로 ‘재미있는 책’ 이야기 또는 재미있는 ‘책 이야기’를 쓰려 한다. 실타래가 풀려나가는 듯한 아라비안나이트식 책 이야기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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