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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뽕'의 개과천선, 2시간만에 효과보는 '자살방지약'으로

중앙일보 2019.03.18 00:03 종합 18면 지면보기
심재우의 뉴스로 만나는 뉴욕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자살. 극심한 외로움에 떨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수치심에 못 이겨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한 결과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16년 한해 동안 전세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수가 81만7000명에 달했다. 27년 전에 비해 6.7% 증가한 것으로, 매년 대도시 하나의 인구가 사라지는 셈이다. 미국의 자살 건수는 선진국 중에서도 높은 편이다. 1999년부터 2016년까지 30% 정도 늘어났다. 2017년에도 전년에 비해 5% 증가한 4만717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특히 10~34세 연령대에서 자살은 사고사에 이어 두 번째 사망원인으로 오를 정도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뉴욕 스테튼아일랜드에서 고교 교사로 일하는 조 라이트(34) 또한 그런 인물이다. 그에게 세상은 늘 잿빛이었다. 수면제를 과다복용하면서 첫 번째 자살시도를 했다. 이후 프로작과 같은 우울증치료제를 복용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자살시도는 두차례, 세차례 계속 늘어났다. 미 보건당국은 자살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보고 발빠른 대처에 나섰다. 지난 5일(현지시간) 미 식품의약국(FDA)이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우울증 치료제의 시판을 승인한 것도 그 일환이다. 일명 ‘자살방지제’이다. 존슨앤존슨이 판매하는 이케타민 성분의 코 스프레이 약이다.
 
◆우울증 환자들 “세상이 달라졌다”=뉴욕의 마운트사이나이 병원과 컬럼비아 의대 연구진이 이번 자살방지제 신약개발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임상시험 결과는 희망적이다. 컬럼비아 의대에서 임상시험에 참가한 라이트가 몇 차례의 투약 끝에 자살 충동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블룸버그통신에 “세상이 달라보인다”고 말한 라이트는 몇 달 뒤 결혼에 골인했다.
 
흥미로운 건 이번 신약이 동물용 마취제인 케타민에 기초해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클럽 등에서 ‘물뽕’ 또는 ‘레이디 킬러’로 오용되는 마약 물질이 바로 케타민이다. 케타민은 이미 1970년대부터 알려진 물질이지만, 1990년대 중반 학계에서부터 시작해 정부와 제약업계가 우울증 개선 노력을 거듭한 결과 20여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마약 성분을 기반으로 한 자살방지약 ‘에스케타민’ 개발에 기여한 뉴욕 마운트사이나이 병원의 데니스 차니 교수. [사진 마운트사이나이]

마약 성분을 기반으로 한 자살방지약 ‘에스케타민’ 개발에 기여한 뉴욕 마운트사이나이 병원의 데니스 차니 교수. [사진 마운트사이나이]

마운트사이나이 병원의 데니스 차니 교수는 대부분의 정신과 전문의가 1987년 발매된 프로작의 작용 메커니즘에 관심을 쏟고 있을 때 대뇌에서 학습과 기억에 관여하는 ‘글루타메이트 시스템’에 주목했다. 케타민이 작용한다고 알려진 곳이다. 차니 교수는 케타민을 마약으로 사용하는 양의 100분의 1로 희석해 우울증 환자에게 투약한지 두 시간 만에 상태가 호전됐다는 결과를 얻었다.
 
차니 교수는 2000년 기존 항우울제가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의 분비에 작용하는 것과 달리 케타민은 또 다른 신경전달물질인 글루타메이트 분비에 작용하며, 빠른 시간 내 약효를 낼 수 있다는 논문을 냈다. 이후 컬럼비아 의대의 빅토리아 아랑고 교수 연구팀 역시 차니 교수와 일맥상통하는 논문을 학술지에 게재했다. 해부학적으로 세로토닌 분비와 자살 충동은 경로가 다르다는 결론이었다.
 
◆마약으로 유통될 가능성도=미 국립보건원(NIH)의 카를로스 자라테 박사 연구팀이 이를 토대로 자살방지제 신약개발에 적극 나섰다. 기존 우울증 치료제의 경우 복용한지 몇주 또는 몇개월이 지나야 약효를 내는데 비해 케타민 계열은 두시간 안에 약효를 낸다는 점이 매력포인트였다.
 
케타민의 화학구조식. [사진 마운트시나이]

케타민의 화학구조식. [사진 마운트시나이]

차니 교수와 공동연구를 한 예일대 존 크리스탈 교수는 “만약 주사제를 투약하고 집으로 가버렸다면 케타민의 약효를 체크하지 못했을 수 있다”면서 “차니 교수의 말대로 72시간 동안 지켜본 결과 2시간 이내 나타나는 신비한 약효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에스케타민이라는 신약성분이 만들어졌고, 최적의 농도와 투입량이 결정됐다. 라이센스를 사들인 존슨앤존슨이 에스케타민으로 첫 임상시험을 했을 때 68명의 환자 가운데 40% 가량에서 마음이 진정됐다는 반응이 나왔다. 임상에 참여한 적이 있는 데이나 매닝(53·여)은 “15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면서 “어깨에 23㎏을 이고지내다 18㎏을 덜어낸 느낌이 들었다”고 당시 감정을 전했다. 이후 수년간 임상시험 환자 수를 늘리면서 테스트한 결과 이달초 시판승인을 따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케타민은 요주의 대상이다. 오·남용의 위험이 있고, 관리부실로 시중에 빠져나갔을 경우 마약으로 유통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번 신약도 프로작 등 기존의 항우울제가 듣지않는 중증 환자에게만 사용된다.
 
FDA는 에스케타민에 대해 허가받은 진료실에서만 의사의 배석하에 흡입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집으로 약을 가져갈 수도 없고 병원에 보관해야 한다. 의사 또한 흡입후 2시간 동안 환자를 관찰해야 한다. 흡입횟수도 주 2회 이내로 제한됐다. 한국은 한해 1만2000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률 1위의 오명을 쓰고 있다. 케타민 신약이 우리나라에도 시판되면 1만2000명 중 상당수를 살릴 수 있다는 결론이 가능하다.  같은 성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심재우 뉴욕 특파원 jwsh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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