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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변신 한석규 “히틀러 연설 장면서 연기 한수 배워”

중앙일보 2019.03.18 00:03 종합 23면 지면보기
영화 ‘우상’에서 뺑소니 사고 희생자 아버지(설경구)와 가해자 아버지(한석규)는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목격자 추적에 나선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 ‘우상’에서 뺑소니 사고 희생자 아버지(설경구)와 가해자 아버지(한석규)는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목격자 추적에 나선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2년 됐죠. 이수진 감독한테 시나리오 받은 게. 한 문장, 한 문장 아주 치밀해요. 정곡을 찔린 듯한 느낌이었어요.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가 관객한테 시나리오만 보여줘도 괜찮다고 할 만큼 글이 좋았는데, 그 이후로 이런 완성도는 오랜만이었죠.”
 

스릴러 ‘우상’서 스크린 25년 집약
도지사 갈망하는 사이코 보는 듯
아들 잃은 설경구와 팽팽한 대립
“50대 돼보니 연기가 더 좋아져”

배우 한석규(55)는 20일 개봉하는 새 영화 ‘우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가 연기한 구명회는 청렴한 이미지로 차기 도지사 후보에 거론되는 도의원.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정치인생이 흔들리자, 감춰왔던 권력욕을 드러낸다. 서슴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싸늘한 표정이 흡사 사이코패스 같다. 한석규가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낯선 얼굴이다.
 
영화에는 뺑소니 사고로 외아들을 잃은 또 다른 아버지 유중식(설경구), 사고 당일 사라진 중식의 조선족 며느리 최련화(천우희)까지 세 인물이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이들이 뒤엉키면서 각자 욕망과 집착이 선명해진다. 중식에게 그 대상이 ‘핏줄’이라면 련화는 ‘생존’ 그 자체다. 특히 구명회는 ‘권력’을 우상으로 삼아 브레이크가 고장난 듯 폭주한다.
 
청소년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룬 데뷔작 ‘한공주’(2014)에 이어 직접 각본을 쓴 이수진 감독은 “한국사회에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건·사고의 시작점을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계기”라고 했다. 한석규는 이 영화를 ‘독’에 빗댔다. “나으려면 쓴 약 먹듯이 우리가 가끔 독도 먹어야 하잖아요. 이런 얘기가 투자가 될까 걱정되다가도 관객한테 꼭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는 “전부터 비겁한, 생존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사는 게 곧 리액션(반응)”이라고 했다.
 
영화 ‘우상’에서 뺑소니 사고 희생자 아버지(설경구)와 가해자 아버지(한석규)는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목격자 추적에 나선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영화 ‘우상’에서 뺑소니 사고 희생자 아버지(설경구)와 가해자 아버지(한석규)는 서로 다른 목적을 위해 목격자 추적에 나선다. [사진 CGV아트하우스]

이 역할을 맡은 건 뭐에 대한 반응이었나. 정치 현실의 영향도 있었나.
“당연히. 살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것에 대해 한 가지 반응만 나온다면 병든 사회다. 그게 우상이지 뭐. 구명회는 중요한 기로마다 비겁하고 교활하게 반응하잖나. 이 인물의 반응, 그 뒤는 뭘까 보여드리고 싶었다. 영화의 매력은 가짜를 통해 진짜의 정곡을 찌른다는 것이니까.”
 
구명회가 알아듣기 힘든 말로 연설하는 장면이 상징적인데.
“시나리오로 읽었을 때부터 강력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방언을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근본 없는 소리를 지껄인다, 청중들이 열광한다, 거기에 흐르는 중식의 대사가 ‘몹쓸 병에 걸렸는데 아프지가 않으니까…’. 연설을 위해 따로 언어를 배우진 않았다. 다만 과거 다큐멘터리에서 본 히틀러 연설 모습을 참고하며 애드리브를 했다.”
 
언론 시사 이후 평가는 엇갈린다. 탄탄한 연기와 몰입도 높은 연출은 돋보이지만 중식 아들의 지체 장애, 예상을 뛰어넘는 련화의 정체 등이 느닷없이 뒤엉키는 통에 이후의 전개가 불필요하게 복잡해진다. 이순신 동상을 훼손하는 장면은 주제를 너무 직설적으로 드러내 오히려 본질을 흐리는 인상도 준다.
 
“창작자 입장에선 얘기할 가치가 있는 이야기인가가 가장 중요하죠. 최근에 (최)민식이 형님이랑 그랬거든요. ‘우리는, 농사꾼들은 정성을 다해 농사 지을 뿐’이라고.” 한석규는 “이수진 감독이 아직 신인이지만, 창작관이 새롭다”며 “제가 신인 감독분들을 좋아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고 보면 90년대 ‘은행나무 침대’의 강제규,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넘버3’의 송능한, ‘접속’의 장윤현,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등 그의 영화는 될성부른 신인 감독들의 등용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젠 제가 영화계에서 선배고, 어떻게 보면 올드해진 것이죠. 하지만 최근에 한국영화를 보면, 새로운 영화가 절실하게 필요한 시기란 생각이 들어요. ‘우상’도 그래서 한 거니까요.”  
 
그는 2011년 사극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소탈한 세종대왕으로 큰 사랑을 받은 데 이어 올해 또 다른 세종대왕 연기에도 도전한다. 최민식과 ‘쉬리’ 이후 20년 만에 만난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다.
 
“연기를 오래 한 배우들은 최고 장단점이 같아요. 대중한테 익숙해진다는 것이죠.” 그는 안경을 가만히 벗어 닦으며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땐 제가 주체적으로 뭔가를 한다, 거기에만 정신이 팔렸어요. 사는 데도 자신감 넘치고, 연기자로서도 아주 맹렬하게 다 할 것 같았어요. 그러다 40대에 건강도 덜커덕하고, 몸도 좀 다쳐서 ‘이걸 왜 하나’ ‘관둬야 하나’ 위축되고 지치기도 했어요. 연기가 하찮게도 느껴졌죠. 50대쯤 돼보니 알겠어요. 아, 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구나. 연기가 좋아지려면 내가 좋아져야겠구나. 나를 보여주는 일이니까.”
 
이번 영화로 만난 설경구·천우희를 두고는 “동료로서, 배우로서 존경한다”고 했다. “연기를 ‘액션’이라고 하지만 결국 ‘리액션’이 다거든요. 예전엔 안 보이고, 안 들리면서 보이는 척, 들리는 척했죠. 지금은 연기하기 전에 주문처럼 욉니다. 정확히 보고, 듣고, 리액션하자.”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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