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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한의 퍼스펙티브] 커지는 복지 사각지대, 방치했다간 ‘나의 일’ 된다

중앙일보 2019.03.18 00:03 종합 26면 지면보기
살 만한 세상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찾동) 사업에 참여한 복지 플래너와 방문 간호사가 서울 방학3동에 있는 독거 어르신의 집을 방문해 건강 검진을 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

‘찾아가는 동주민센터’(찾동) 사업에 참여한 복지 플래너와 방문 간호사가 서울 방학3동에 있는 독거 어르신의 집을 방문해 건강 검진을 하고 있다. [사진 서울시]

“폐 질환으로 식당 일을 할 수 없어 소득이 없고 도움을 줄 가족도 없음. 본인 소유가 아닌 돈이 통장에 입금돼 금융재산 500만원 초과로 긴급의료비 지원 불가. 건강 악화로 진료 시급하나 소득이 전무하여 병원비 부담 불안으로 진료 거부. 퇴원 후 생계 걱정으로 불안감 호소.”(50대 여성 A 씨, B 의료원 사례)
 
“농촌 지역 신도시 개발로 인한 외부 인구와 자본 유입으로 지역 사회 내 급격한 변화. 기존 거주자의 빈곤화 속 우울 및 생활고로 인해 극단적 선택 시도. 응급실에서 의료기관으로 옮긴 후 재입원 반복,지속적 입원으로 경제 활동 붕괴되고 무력감으로 치료 의지 없음.” (60대 남성 C 씨, D 의료원 사례)
 
IBM의 암 진단 소프트웨어 ‘왓슨 포 온콜로지’가 인간 의사보다 정확하게 암을 진단하고, 유전자 가위 기술이 DNA를 교정해 유전병을 예방하며, 정밀 의학을 통해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한 표적 치료가 가능해지는 첨단의료 시대지만 의료복지 사각지대에 놓여 최소한의 생존도 보장받지 못하는 취약계층이 여전히 존재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부실한 사회안전망 속에 나 자신도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음을 망각한다는 점이다.
 
지금 세계는 4차 산업혁명의 기치 아래 질주하고 있다. 사회의 질적 변곡점마다 더 나은 삶과 일자리가 생길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항상 있었지만, 전환을 위한 충분한 적응의 시간과 제도적 안전장치가 존재한다면 모를까, 변화의 충격을 감내하는 것도 적응에 실패했을 때 낙오를 감당하는 것도 개개인에게 지워진 책임이다.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우리나라의 경우 실패로부터 두 번째 기회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초불확실성의 시대’(Age of Hyper-Uncertainty)에서 현대인에게 미래는 곧 불안의 동의어다. 신뢰의 사회안전망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개개인은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불안하므로 기회 있을 때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 불필요한 부를 과도하게 쌓아두려 하고, 자녀의 미래가 불안하므로 위장 전입을 하고 답안지를 훔치고 엄청난 사교육비를 지출해서라도 교육 지위를 물려주려 한다. 불안의 시대엔 건물주가 조물주보다 높아지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끝이라는 불안에 불평등의 격차를 벌리고 자신이 올라온 사다리를 걷어차 타인이 오르지 못하게 냉혹해진다.반칙은 기본이고 규칙을 유리하게 고치는 것도 불사한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고 ‘저녁이 있는 삶’을 사는 건 다른 세상의 일이다. 경쟁에서 도태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경쟁적이고 소모적인 업무에 시간과 몸·영혼을 갈아 넣고 미래까지 미리 당겨 갈아 넣는다. 자신의 유전자를 담은 후손이 살 수 있는 안전한 세상이 아니라고 판단하니 저출산으로 이어진다. 상황이 근본적으로 심각한데 사회안전망을 구축해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게 아니라 돈을 얼마 풀면 출생률이 높아질 거라는 대책이 참으로 피상적이다.
 
기본적 생존이 보장되는 안전망이 있어야 개인이 양심과 소신을 지키며 독립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새로운 시도의 실패가 반복되더라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라야 도전과 발전이 있다.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비극은 현재 진행형이다. 2014년에는 사회안전망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생활고로 고생하다 집세와 공과금 70만원, 죄송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 송파 세 모녀사건이 있었다. 2017년에는 사망한 지 2개월이 넘도록 이웃이나 행정 기관에서 알지 못한 채 시신이 방치됐던 증평 모녀 사건이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이들을 동정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일일 뿐일까. 우리 공동체에 균열이 생기는 신호라 할 수 있다. 누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고용보험이나 연금보험 같은 사회보험(1차 안전망), 노인연금이나 국민기초생활보장 같은 공공부조(2차 안전망), 위기상황에서의 긴급 복지 지원(3차 안전망)이 우리를 촘촘한 그물처럼 보호해 줄까. 삶의 낙오를 경험한 후 재기할 기회가 주어질까.
 
심화하는 경제적 불평등은 건강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계층·지역 간 건강 격차가 벌어져 인간의 기본 권리인 건강권을 위협하고 있다. 건강과 사회경제적 상태는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질병 치료를 위한 높은 의료비 지출은 가계에 경제적 타격을 입히고 질병 악화는 경제 활동을 중단하게 하여 빈곤을 가중시킨다. 반대로 빈곤은 환경과 영양 측면에서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정기 검진이나 건강 정보를 통해 빠른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낮춘다.
 
우리나라의 의료보장은 사회보험 방식의 국민건강보험(1차 안전망), 사회경제적 취약 대상자가 신청을 통해 얻는 의료급여(2차 안전망), 그리고 재난적 의료비 지원을 신청하여 얻는 긴급 지원(3차 안전망)으로 구성된다. 이론상으론 소득 수준별로 자격이 부여되어 전 국민이 포괄되는 의료 안전망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지역별 의료 접근성의 불균형과 보건·의료·복지 서비스 연계의 단절, 의료보장 자격 적용의 비현실적 엄격성 등으로 인해 수급 대상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생겨 사각지대가 생기게 된다. 고령 인구의 증가, 1인 가구의 증가, 만성질환자의 증가 같은 사회적 맥락에서, 기존의 의료보장시스템에서의 사각지대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001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잘 설계된 복지국가에서는 개인이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할 수 있으므로 더 혁신적인 사회로 발전하고 더 큰 경제적 성과가 도출된다”고 주창했다. 복지는 소비가 아니라 투자이며, 더 발전된 사회로 나아가는 필수 요소다.
 
몇 가지는 분명하다. 첫째,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복지 사각지대가 짙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망각해선 안 된다. 급속한 변화 속 닥칠 위기는 멀리 있는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일일 수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둘째, 기존 복지제도가 탁상행정 차원이 아니라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지 신중히 점검해야 한다. 셋째, 4차 산업혁명의 혜택이 모두에게 고루 나눠질 수 있는 방안을 산업 발전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넷째, 사회 변화가 만들어 낼 새로운 사회적 부작용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연구하고 투자해야 한다.
 
사회안전망은 산업 고도화에 발맞춰야 하지만 쉽지 않은 과제다. 새로운 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맞이하는 지금 기존 1·2·3차 사회안전망을 넘어 새로운 사회문제에 대비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4차 산업혁명과 4차 사회안전망은 필연적 과제이기도 하다.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 교수·리셋 코리아 보건복지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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