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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교두보 노린 왜국, 백제 부흥세력 도왔지만…

중앙선데이 2019.03.16 00:21 627호 17면 지면보기
[이훈범의 문명기행] 백제 멸망 후 국제 전쟁
충남 공주시에 있는 공산성은 백제시대엔 웅진성으로 불렸다. 당초 토성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돌로 다시 쌓았다. 사진은 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 문의 동문루. 무너져 사라진 것을 2층 3칸 건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복원했다. [박종근 기자]

충남 공주시에 있는 공산성은 백제시대엔 웅진성으로 불렸다. 당초 토성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돌로 다시 쌓았다. 사진은 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 문의 동문루. 무너져 사라진 것을 2층 3칸 건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복원했다. [박종근 기자]

충남 공주의 공산성(公山城)은 아름다워서 더 슬픈 곳이다. 한자 공(公)자처럼 생겼다 해서 공산이고 거기에 쌓은 성이어서 공산성이다. 공주시는 오늘날 공산성을 참으로 아름답게 복원해놓았다. 성곽을 따라 2.2km를 걸을 수 있는데 산길은 물론 금강의 도도한 흐름을 감상하며 산책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을 ‘웅진성’이라 부르던 백제의 멸망을 목격한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사비(부여)의 부소산성에서 나당(羅唐) 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치렀던 의자왕은 옛 수도였던 웅진(공주)으로 달아났다 이곳에서 항복했다. 이후 태자인 부여융과 함께 당나라로 끌려간다. 다음에 자세하게 얘기하겠지만, 승자의 잔에 술을 따라야 했던 임금의 굴욕을 고스란히 지켜본 것이 바로 웅진성, 지금의 공산성인 셈이다. 그에 앞서 백제의 멸망 이후 벌어진 국제전(國際戰)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이전 회에서도 언급했듯, 가야가 망했을 때 비통해 마지않던 왜국 조정은 백제가 망했을 때는 비교적 차분한 태도를 취한다. 가야의 멸망 소식을 듣고 흠명천황은 이런 조칙을 내린다.
 
 
백제 부흥세력, 왜국에 눈물의 지원 요청
 
“나라의 왕의 신하로서 사람의 곡식을 먹고 사람의 물을 마시면서 누가 차마 이것을 듣고 마음으로 슬퍼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태자와 대신은 그 자손인 연유로 피눈물을 흘리고 원한을 품고 있다. (…) 충성을 다하여 함께 간악한 역적을 죽여 천지의 큰 아픔을 씻고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어서도 신하의 도리를 이루지 못한 한이 남을 것이다.” (『일본서기』562년 6월)
 
반면 백제 멸망 때는 냉정함을 유지한다.
 
“고구려 승려 도현(道顯)의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춘추지(김춘추)가 대장군 소정방의 도움을 얻어 백제를 협공해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는 자멸했다. 왕비가 요사스럽고 무도해 국정을 좌우하고 현명하고 어진 신하를 주살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일본서기』 660년 7월 16일)
 
백제와 왜의 동맹관계가 가야와 왜의 혈맹관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백제가 선진 문물을 전해주는 대가로 일본의 군사지원을 받긴 했지만, 중앙집권적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가야에 비해서는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덜했을 터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런데 가야의 멸망 때는 신라를 욕하는 것 말고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던 왜는 백제의 저항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지원을 한다. 여러 기록을 종합할 때 663년 ‘백강(白江) 전투’ 때까지 한반도에 파견한 지원병력은 세 차례에 걸쳐 5만 명에 가깝다. (틀림없이 과장이 있을 터지만) 선박 역시 1000척에 이른다. 지원을 준비하던 제명천황이 661년 급서한 뒤 태자인 나카노오에(천지천황)가 즉위식도 미뤄가며 지원에 전력했을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우선 가야의 경우 부흥세력이 없었다. 따라서 복수를 위해서는 왜 단독으로 신라와 전쟁을 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반면 백제는 사실상 부흥운동이 마감되는 백강 전투에 이르기까지 3년에 걸친 저항이 있었다. 백제 멸망 두 달 뒤 부흥세력이 왜국에 지원 요청을 하는 장면이 눈물겹다.
 
“백제가 달솔(2등급 관직) 등을 파견해 고했다. ‘군신이 모두 포로가 돼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습니다. 은솔(3등급 관직) 복신이 격분해 임사기산(임존성)에 웅거했습니다. 달솔 여자진은 중부 구마노리성(공주)에 웅거했습니다. 각기 군영을 만들어 흩어진 병졸을 모았습니다. 무기는 이전 싸움에서 다 써버려 막대기를 들고 싸웠습니다. 신라의 군사가 쓰러지면 그 무기를 빼앗았습니다. 그렇게 백제의 무력이 늘어나서 당도 감히 공격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신 등은 백제의 백성을 불러 모아 함께 왕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 이미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있습니다.’” (『일본서기』 660년 9월5일)
 
아울러 661년 12월 고구려가 소정방의 35만 대군을 평양성에서 물리쳤다는 소식을 듣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듬해 1월 연개소문이 평양 근교에서 당군 10만을 전멸시켰고, 고립된 소정방을 신라군대가 간신히 구원한 사실도 자신감을 키웠을 것이다.
 
“고구려가 ‘12월에 고려국(高麗國·고구려)이 몹시 추워 패강(浿江·대동강)이 얼었습니다. 당군은 운차(망루가 있는 수레), 충붕(성문을 부수는 무기)을 끌고 북과 징을 울리며 진격했습니다. 고구려 군사는 용감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당의 두 보루를 빼앗았습니다. 진지 두 곳만 남았고, 그것은 밤에 빼앗을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당 군사가 무릎을 껴안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날카로움이 둔해지고 힘이 빠져 빼앗을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고했다.” (『일본서기』 661년 12월)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는 적군에 측은지심이 생겨 공세를 멈췄다는 얘기다. 고구려 사신의 허풍이 재미있지만, 과장된 얘기가 분명하다. 이 일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글필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했을 때 강이 얼었다. 그는 무리를 이끌고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강을 건너 공격해왔다. 우리 군대가 싸움에 져 달아났다. 글필하력이 수십 리를 추격해 3만 명을 죽였다. 남은 무리는 모두 항복했고 남생은 겨우 자신의 몸만 피해 달아났다. 이때 당나라에서 군대를 철수하라는 조서가 있어 그들은 곧 돌아갔다.” (본기 보장왕 20년)
 
이것 역시 편향된 것처럼 보이지만 강이 어는 바람에 당군의 도강이 가능했고 방심하던 고구려군이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당군의 철군은 돌궐의 일족인 철륵이 중국 북부 초원에서 봉기를 일으킨 때문이었다. 철륵의 봉기가 고구려의 사주에 의한 것이니 고구려 사신의 허풍이 아주 엉터리만은 아니다. 글필하력의 철군으로 다른 루트로 공격하던 소정방과 방효태의 주력군이 고립 위기에 처한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군 10만 명을 전멸시킨 ‘사수(蛇水) 전투’는 기록이 존재한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662년 정월, 당나라 장수 방효태가 연개소문과 사수에서 싸웠다. 그의 군대가 전멸했고 방효태도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했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렸으므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처럼 당나라는 앞뒤의 전쟁에서 매번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본기 보장왕 21년)
 
『삼국사기』 김인문 열전은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
 
“소정방은 6군을 거느리고 만리 길을 달려 패강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했다.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고구려인들이 굳게 수비하자 이기지 못했다. 오히려 병마가 많이 죽거나 다쳤고 보급로도 끊어졌다.”
 
왜로서는 기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당이 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약 15만 명)의 3배 규모가 되는 대규모 작전으로도 고구려의 예봉을 꺾는 데 실패했으니 한동안 다시 대군을 동원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 사이 역대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신라가 세를 키우면 다시는 한반도에 얼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백제 부흥세력을 지원해 한반도 남부지역에 교두보를 만들고, 가능하면 괴뢰정부를 세울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대규모 지원군을 동원했지만 선박건조 기술이나 해전 전략, 수군의 훈련 면에서 국제전을 치를 만한 깜냥이 아니었다. 오늘날 금강 하구인 백강에 정박한 왜선이 1000척이나 됐지만 170척에 불과했던 당나라 군대를 당해내지 못하고 400척이나 침몰했다. 일본 스스로도 인정하는 참패였다.
 
 
의자왕과 부여융, 낙양 북망산에 묻혀
 
충남 부여 능산리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 오른쪽이 의자왕 묘다.

충남 부여 능산리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 오른쪽이 의자왕 묘다.

“28일에 일본의 장군들과 백제왕이 기상을 살피지 않고 ‘우리가 선수를 친다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전날 패배로) 대오가 흔들린 일본 중군의 병사들을 이끌고 다시 나아가 진열이 굳건한 당의 군사를 공격했다. 하지만 당이 곧 좌우에서 배를 둘러싸고 싸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관군이 패배했다. 이때 물속으로 떨어져 익사한 자가 많았다.”
 
『구당서(舊唐書)』유인궤전은 좀 더 처참하게 묘사한다.
 
“인궤가 왜병을 백강 하구에서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배 4000척을 불태웠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 (…) 백제의 모든 성들이 귀순했다.”
 
이로써 백제의 부흥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백강 전투에서 망한 조국의 부흥을 위해 싸웠던 백성들과 왜국 병사들에 맞서야 했던 비운의 태자 부여융은 아버지 의자왕과 함께 당나라 수도였던 낙양의 북망산에 묻혔다. 북망산은 한대 이후로 중국의 왕후공경들의 묘역이 돼온 곳이다. 하지만 포로로 잡혀왔던 망국의 왕의 무덤을 누가 신경이나 썼겠나. 시간과 함께 잊혀졌던 것을 1996년 백제의 후손들이 의자왕 묘로 추정되는 지역을 발견했다. 이후 2004년 그 지역 흙을 가져와 충남 부여 능산리의 백제 고분군 옆에 의자왕과 융의 가묘를 만들었다. 하지만 선왕들의 묘와는 달리 조선 시대 양식으로 만들어져 서글픔을 더한다.
 
이훈범 대기자 / 중앙콘텐트랩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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