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탐사하다] 교실은 피라미드…허리가 무너졌다

교실은 피라미드…허리가 무너졌다

중앙일보 2019.03.15 01:30 종합 1면 지면보기
‘오늘 ○월 ○○일은 내가 학교라는 곳에 오는 마지막 ○월 ○○일이 될 거야. 내년 ○월○○일엔 어디 있을지 모르지만 그곳이 학교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올해 A고 3학년이 된 진영이(18·가명)가 매일 교문에 들어설 때마다 하는 생각이다. 1년만 버티면 학교로부터 해방된다는 게 그나마 희망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진영이는 대학에 갈 생각이 없다. 공부는 지긋지긋하고, 학교엔 신물이 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고1 때 성적은 전교 10~20등권이었다. 명문으로 이름난 A고에 입학한 것도 진영이가 원해서였다. 이를 위해 부모를 졸라 이사까지 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맞벌이인 부모는 진영이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진영이의 등수가 올라가면 기뻐했고 진영이는 그게 좋았다. 하지만 점차 달라졌다. “네가 성적이 더 잘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엄마·아빠는 알아.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거니?”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듣게 되는 말이었다. 진영이로선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공부하기 싫어지고 등수가 더 떨어지고 부모는 실망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는 무기력했고, 사소한 일에도 분노가 치밀곤 했다. ‘어차피 부모님을 만족시키지 못할 텐데….’ 진영이는 공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고2 늦봄 더는 공부를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같은 반이 된 ‘일진’ 영철이(가명)는 유일하게 진영이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다. “공부해서 성적 조금 잘 나와도 아무것도 안 바뀐다”는 영철이의 말에 위안을 얻곤 했다. 그러다 영철이 일행과 무전취식을 하다가 경찰서에서 조사받았다. 
 
부모가 수습하느라 동분서주하는 것을 보곤 진영이는 큰 말썽은 피우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공부하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에선 투명인간처럼 지낸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단 한 순간도 공부하고 싶어서 한 적은 없어요. 왜 해야 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공부라는 걸 하느라 정작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고민할 시간은 전혀 없었어요. 결국 나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놈이 돼 버렸어요. 엄마·아빠는 항상 바빴고, 내가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성적만을 원했어요. 대학이요? 대학 가면 공부 안 해요?”
 
진영의 어머니(47)는 속상할 뿐이다. “뭐가 잘못돼 아이가 엇나가는지도 모르는 채 스스로 너무 못 할 짓을 하는 아들을 봐야 하는 게 제일 속상하다. 여러 번 대화하려 했지만 속내를 말하지 않고 '왜 공부만 강요하느냐'고 한다.”
 
진영이처럼 공부하지 않기로 선택한 학생을 교실에서 보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년 가까이 학습부진 학생을 상담해온 김현수 정신과 전문의(성장학교 ‘별’ 교장)는 “예전 교실에는 학업 성취 능력이 좋은 학생 10%와 능력이 떨어지는 10% 사이의 중간층이 두터웠지만 지금은 ‘안 하는 아이들’이 다수가 돼 버렸다”며 “100명 중 2명만 잘하고 98명은 공부를 안 하는 식이니 98명 중 한 명이 되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진영이처럼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중간층인 계층도 예외는 아니다. 이로 인한 학력저하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회원국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만 15세 대상, 3년 주기 실시)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은 2000년 PISA에 응시한 이후 꾸준히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는데, 특히 중위권 학생이 두터운 게 특징이었다. 그러나 가장 최근 수치인 2015년엔 읽기 영역에서 최하위성적자 비율이 13.6%로 나와 발칵 뒤집혔다. 2000년(5.6%)에 비해 크게 는 수치여서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교육정책전문가인 변수용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부교수는 2000년과 2015년 최하위성적자들을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5분위)와 연동해 추가로 분석했다. 그랬더니 2000년 응시자 4521명 중 최하위성적자는 255명. 이 중 사회경제적 지위가 가장 최하위 20%(1분위)에 속하는 학생이 108명, 중간인 3분위 학생이 39명으로 나왔다. 2015년엔 응시자 5202명 중 그 숫자가 각각 666명, 269명, 122명이었다. 전체적으로 최하위성적자가 2.3배 느는 동안 최하위층에선 2.2배, 중간층에선 2.7배 증가했다. 중간층의 하락폭이 더 크다는 의미다. 이로 인해 최하위성적자 중 1분위 학생 비율이 2000년 42.4%에서 2015년 40.4%로 준 데 비해 중간층인 3분위 학생의 비율은 15.3%에서 18.3%로 늘어났다. 변 교수는 “한국 최하위성적자의 증가는 중간 계층의 급락 때문으로 해석된다. 이는 사회적 중산층이 사라지는 현상과 맞물려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사회에서도, 교실에서도 피라미드의 허리인 중간 계층의 일부가 밑으로 추락하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관련기사
일부 전문가는 일본처럼 ‘하류화(下流化)’ 현상이 나타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한다. 장기 불황으로 소득 격차뿐 아니라 계층 의식의 양극화도 심화하며 중류가 몰락하고 하류가 증가, 하류가 주류가 되는 것을 가리킨다. 김현수 교장은 “특히 저성장 사회의 여파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지속 기간이 길어지면서 일본의 하류사회 개념이 이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탐사보도팀=유지혜·정진우·하준호 기자 wisepen@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교실이데아 2019] 학부모 선호도 높은 초등학교, 서울대 진학률이 높은 고등학교를 인포그래픽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news.joins.com/article/23411619
도움 말씀 주신 분(가나다순)
김경근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김동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 김수동 심리치료사, 김용학 연세대 총장, 김현수 성장학교 ‘별’ 교장(정신과 전문의), 박민규 고려대 통계학과 교수, 방승호 아현정보산업고등학교 교장, 변수용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부교수, 송인한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송형호 교사,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심정섭 더나음연구소장,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 오세정 서울대 총장, 장희선 굿네이버스 아동권리연구소 연구원(사회복지학 박사), 전상용 전 동덕여고 교장, 최성수 성균관대 사회학과 조교수, 홍현주 한림대의대 ‘자살과 학생 정신건강 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