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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휘의 한반도평화워치] 하노이 회담 실패 이후 한국의 중재 외교 가능한가

중앙일보 2019.03.15 00:05 종합 24면 지면보기
북·미 회담 불씨 살리기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의 후폭풍이 거세다. 미국과 북한의 셈법을 정확히 확인하는 성과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실패를 에둘러 포장하는 수사(修辭)일 뿐, 정상회담으로는 매우 드문 일이 발생한 건 분명하다. 어느 정도 시간은 지났고, 국내외 전문가들에 의한 실패의 복기(復棋)는 충분히 이뤄진 셈이다. 북·미 정상회담 이후 냉각기가 짧을 수도 있지만, 당분간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 문제에 자신의 정치적 자산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야 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냉각기가 길어질 수 있다. 또 미국과 중국은 대규모 무역협상 타결을 목전에 두고 있는 터라 돌발 변수가 되어버린 북한 비핵화 문제가 미·중 협상과 맞물리는 것도 마땅치 않을 것이다.
 
과연 한국 정부의 중재자 역할은 가능할 것인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소규모 위기 국면에서는 중재자 역할이 가능할 것이고, 대규모 위기 국면이 도래한다면 우리 정부의 중재외교를 위한 공간은 쉽게 생기지 않을 것이다. 작년 북·미 협상에 위기상황을 맞이했을 때 우리 정부는 두 차례에 걸쳐 의미있는 중재자 역할을 한 경험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소위 ‘편지 소동’으로 1차 북·미 정상회담 무산을 거론했을 당시 5월 26일 성사된 전격적인 남북 정상회담은 싱가포르 회담 가능성의 물꼬를 텄다. 지난해 7월 초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빈손 방북’이 논란이 되었을 때도 9·19 평양공동선언과 유엔총회에서의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미 협상의 동력을 이어가는 데 기여한 바 있다.
 
하지만 당시는 미국과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얼굴을 마주한 채 상대방의 입장 차이를 분명히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실무 협상 단계에서 다양한 융통성을 발휘해서 양 정상이 바라는 근사치를 만들어 내면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김정은 위원장 혹은 트럼프 대통령이 서로를 향해 꺼내 든 카드를 누구 한 사람이 철회하거나 대폭 수정해야 하는 매우 복잡한 상황이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중재자 역할은 두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우리에게 미국과 북한의 속내를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혹시라도 김정은 위원장은 66시간 동안 대륙을 달리는 연출 장면이 본인의 비핵화 진정성을 대신 말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α’를 둘러싼 국내외 언론의 수많은 예측을 지워버리고, ‘영변 폐기’라는 단 하나의 카드만으로 중간선거 이후 궁지에 몰리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담판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던 것일까? 만약 그랬다면 마지막 순간에 판을 키워버린 트럼프 대통령이 야속하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김혁철-비건’ 라인의 실무 협상에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우리는 북한의 진정한 속내를 읽을 수 있을까?
 
상대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는 짐작하기 쉽다. 대선과 중간선거의 어젠다 세팅 방식이 다른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년 중간선거에서 북한 문제가 전혀 거론되지 않았던 건 다소 의외다. 냉전 종식 이후 어떤 정부도 해내지 못했던 북한 문제 해결을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지는 분명하고, 동시에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는 ‘소환 권력(summoning power)’으로 알려진 민주당의 하원 장악 이후 북한 문제에 관한 미국의 주류 엘리트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만족하게 하는 방안은 하나뿐이다. 어떻게든 북한을 달래고 또 윽박질러서 비핵화 결실의 파이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탄핵에 대한 목소리가 작지 않지만, 펠로시 하원의장으로 대표되는 민주당 지도부가 정치적 후폭풍을 염려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 역시 트럼프 대통령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럴수록 북한 문제에 대한 통 큰 성과를 거둬서 주류 엘리트들의 눈높이에 맞춰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미·중 관계, 동북아전략, 국내 정치 등 복잡하게 얽힌 미국의 셈법을 정확하게 읽어내야만 한다.
 
둘째, 한국의 중재자 역할은 북한과 미국을 상대로 동시에 던질 수 있는 각각의 메시지가 있어야만 한다. 우리는 북한과 미국에 건넬 비장의 카드를 준비하고 있는가?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수사(修辭)로만 반복되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미덥지 못하다.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고 풍계리를 자체 해체했지만, 미국의 입장에선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 철회와 대규모 야외동원훈련 중단 역시 절대 만만치 않은 대응카드였다. 인과관계를 설명하지 못하는 북한의 비핵화를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북한 미래에 대한 장밋빛 기대 역시 사실은 트럼프 대통령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이 비핵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정교한 논리를 만드는 일은 중재자를 자임하는 우리의 몫이다.
 
북한에 안겨줄 메시지의 포인트는 핵 개발이 생존을 위해서였다는 북한의 주장을 받아들여, 비핵화는 생존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비핵화 과정’은 또 다른 ‘생존의 제공’이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핵 문제가 갖는 특수성으로 인해 북·미 차원의 담판에 우리가 북한을 위한 ‘생존 로드맵’을 짜주기는 어렵겠지만, 현시점에서 실행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위해 미국과의 적극적인 논의는 가능할 것으로 본다. 이제 향후 협상 과정에서 ‘영변 폐기’는 상수가 되었고, 대북 제재의 실효성도 확인되었다. 어느 시점에서 북한이 +α에 대한 성의를 보인다면, 미국 역시 대범한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위기의 순간에 직면한 지금, 중재외교에 대한 국가적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개성과 금강산 재개, 좋은 중재 카드 아니다
국제정치학자 중에는 제재를 통한 국제관계 변화를 연구하는 제재연구자 그룹이 있다. 국내에도 몇몇 연구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국내 학계 차원을 넘어 국제 학계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사례들을 볼 때, 제재 성공률은 50%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제재가 성공을 거둔 사례들은 대체로 세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제재 대상 국가가 국제경제 체제에 깊숙이 들어와 있고, 제재가 실패했을 경우 국제사회의 다음 선택인 군사적 옵션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며, 제재에 관여해 목소리를 높이는 제3자 국가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세 가지 기준 중 어떤 것을 고려하더라도 북한은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아 보인다. 특히 북한의 경우 제재 주체인 미국과 객체인 북한 사이를 적극적으로 오가는 중국이라는 제3자 국가가 존재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한반도평화프로세스가 의미 있는 입구를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대북 제재의 중요성을 강조하자는 의도는 없다.
 
정부 및 정치권 일각에선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재개를 중재안으로 활용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 아이디어는 적어도 지금 단계에선 좋은 중재안이 되지 못한다. 당면 문제만을 극복하자는 근시안적 접근일 수 있고, 동시에 과거 기능주의적 접근의 한계를 반복하는 오류를 반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햇볕정책 당시 기능주의적 사고는 전환효과(spill-over effect)를 막연히 기대하는 수준이었다. 정교하고 치밀한 계획 없이 남북 교류협력이 언젠가는 북한 사회 변화와 비핵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기대에 의존한 정책이었다. 물론 교훈도 있었고 후일을 위한 토대가 되기도 했다.
 
현시점에서 개성 및 금강산 재개 제안이 북한의 의미 있는 전환효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정교한 논리를 미국에 제시하지 못하는 한 한·미 협조체제의 동력만 상실할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중재 외교가 국내 정치적 이슈로 전환될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다. 개성과 금강산으로 대표되는 카드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하노이 정상회담을 계기로 미국은 패를 공개했고, 북한은 패를 노출했다. 미국은 파이를 키워 빅딜을 원하며, 다음 협상에서 영변 폐기는 무조건 전제로 해야 한다는 패를 공개했다. 북한은 제재가 상당히 고통스럽다는 패를 노출시켰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추구하는 중재자 역할의 가이드라인이 정해진 셈이다. 비핵평화 프로세스의 입구 단계에서는 북한의 양보, 그리고 프로세스가 입구를 지나 일정한 궤도에 오른 다음 단계에는 미국의 양보, 이러한 조건에서 우리 정부의 고민은 시작돼야 한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정치학 교수·리셋 코리아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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