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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로 실컷 부부싸움 하고 싶던 한국 여자, 지금은…

중앙일보 2019.03.14 07:00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17)
인생 환승. 중앙일보의 [더,오래]를 열심히 구독하고 있다면 이 말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 의식적인 환승도 있지만 정신 차려 보니 이미 갈아탔음을 알게 될 때도 있다. 나에게는 제주에서 도쿄로의 이주, 공장노동자에서 자막번역가로의 환승이 있었다. 지금은 어찌어찌 출판번역가의 길도 걷기 시작했다.
 
1994년. 일본인 남편과 결혼하고 도쿄에 삶의 터전을 잡았을 때, 나는 일본어가 서툰 외국인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일본인은 어린아이 대하듯 말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꿈틀거린다. ‘나는 일본어가 서툰 것이지 어린아이가 아니거든’이라고.
 
그 당시의 꿈은 능통한 일본어로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남편과 제대로 부부싸움을 하는 것이었다. 머릿속 생각을 일본어로 다 쏟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시원할까. 내 심정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없음이 답답했다.
 
첫 번역 책 『일상이 가뿐해지는 마음정리법』
2015년 6월에 출간된 『일본 남자여도 괜찮아』(양은심 지음)와 처음 번역해본 『일상이 가뿐해지는 마음 정리법』(라일 폭스 지음, 양은심 옮김).

2015년 6월에 출간된 『일본 남자여도 괜찮아』(양은심 지음)와 처음 번역해본 『일상이 가뿐해지는 마음 정리법』(라일 폭스 지음, 양은심 옮김).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2017년. 일본어로 시원하게 부부싸움을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여자는 『일상이 가뿐해지는 마음 정리법』이란 책을 번역하게 된다. 번역 수준은 덮어두고, 일본말 잘하는 것이 정말 절실했다. 번역해 나가는 과정에서 내 마음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진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덤이었다. 출판사에서 정한 한국어판 책 제목을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 일본어판 제목은 『거울이 가르쳐주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번역할 수 있게 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그 인연은 2015년 6월 『일본 남자여도 괜찮아』라는 책을 쓴 데서 시작된다. 그해 여름, 나는 내 책을 출판한 출판사가 일본 책 판권을 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냥 흘려들었다. 그때만 해도 ‘책을 번역하는 일’이 나의 현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60대쯤 책 번역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어디까지나 ‘꿈’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나에게 달라고 해볼까. 그래,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는 내 책을 담당했던 편집자에게 카톡을 보냈다. “혹시 판권을 산 책 중에 번역자가 정해지지 않은 책이 있다면 제가 하면 어떨까요.” 그리고 편집자가 부담을 느끼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저는 하게 되면 번역가 데뷔를 할 수 있어서 좋고, 못하면 번역할 부담이 없어서 마음이 편안할 터이니 걱정하지 말고 거절해도 되요”라고. 이 말은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결과는 나에게 맡겨 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출판번역가로 데뷔했다.
 
두 번째 번역한 책 『나이 들수록 인생이 점점 재밌어지네요』(와카미야 마사코 지음, 양은심 옮김). [사진 양은심]

두 번째 번역한 책 『나이 들수록 인생이 점점 재밌어지네요』(와카미야 마사코 지음, 양은심 옮김). [사진 양은심]

 
2019년 올해. 『나이 들수록 인생이 점점 재밌어지네요』라는 책을 번역했다. 두 번째 번역이므로 꿈이 확실한 현실이 된 것이다. 한 권 때는 우연히 얻게 된 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책까지 우연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한 걸음 나아갔다고 자부한다.
 
제주에서 태어나 도쿄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서울에 있는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있다. 지금 나에게는 3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야말로 인간관계가 만들어 내는 매직이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어책을 번역하게 되었을 때의 장점이라면 저자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물론 저자가 응해 줄 때의 이야기이다. 2019년 1월 16일. 우에노 공원에 있는 카페에서 위 책의 저자인 와카미야 마사코(若宮 正子) 씨를 만났다. 출판사를 통해 연락했고 와카미야 씨는 흔쾌히 응해 주셨다.
 
와카미야 마사코씨와의 만남. [사진 양은심]

와카미야 마사코씨와의 만남. [사진 양은심]

 
책을 출판하고 나서의 이야기, AI 시대에 대한 이야기, 게임 앱에 관한 이야기 등등. 만나자마자 노트북을 꺼내 들고 자기소개를 시작해 내 눈을 동그랗게 만드셨던 만 83세가 되는 분과의 에너지 넘치는 만남이었다. 한국어판이 나오면 개인적으로 서울에 가겠다는 말에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 행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야기를 끝낸 저자는 작은 백팩에 노트북을 집어넣고 사뿐사뿐 카페 문을 나섰다. 정년퇴직 후 더 알찬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내 인생의 롤모델이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인생의 롤 모델 된 83세의 일본인 저자
무엇인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행동해야 한다.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찾아내기란 사막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며, 요즘 세상에 굳이 사막에서 바늘을 찾으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완벽하게 실력이 갖추어지는 날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우선 지금 현재의 실력에 맞는 일을 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지금의 나에게 소설을 번역할 능력은 없다. 이제 막 발걸음을 뗀 발전도상의 출판번역가이다. 일본어 실력도 한국어 실력도 모자라다. 하지만 60세쯤에는 소설을 번역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고 싶다. 나는 1966년생 만53세. 한일자막번역은 생업이고, 책 번역은 좋아하는 일이 되었다. 가끔은 내 책도 내고 싶다. 하나의 길을 가는 것도 좋지만, 당분간은 양다리, 세 다리 걸치며 삶을 즐기려 한다. 나이 들수록 인생이 점점 재밌어지고 있다.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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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심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필진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 일본인과 결혼해 도쿄에 살림을 꾸린지 약 25년. 일본으로의 이주는 성공적이라고 자부한다. 한일자막 번역가이자 작가이며,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다. ‘한일 양국의 풀뿌리 외교관’이라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한국보다도 더 비빌 언덕이 없는 일본에서 그 사회에 젖어 들고, 내 터전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연재한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과 같은 이야기가 독자의 삶에 힌트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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