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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찬호의 시선] “청와대를 뭐로 알고 이러세요”

중앙일보 2019.03.14 00:10 종합 28면 지면보기
강찬호 논설위원

강찬호 논설위원

4년 전인 2015년 10월.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자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 전신)은 국회 일정을 전면 보이콧하며 반발했다. 정국을 풀기 위해 새정치민주연합은 박근혜에게 문재인 당 대표(당시)와 양자회담을 제안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대통령과 여야 대표에다 여야 원내대표까지 넣어 5자 회동을 하자”고 고집했다.
 

야당 시절 박근혜 ‘뒤끝’에 당한 민주당, 여당 되니 똑같은 모습
자신들이 없앤 ‘국가모독죄’ 부활시킨 모순, 또 하나의 내로남불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이종걸(당시)은 청와대 의중이 궁금했다. 참모진을 소집해 “박 대통령이 문재인 대표 만나는 거로 충분할 텐데 왜 나까지 보려 할까”라고 물었다. 원내대변인 박수현이 손을 들었다. “3년 전 박 대통령을 ‘그년’이라 했지 않았나. 청와대로 불러 앙갚음을 하려는 듯하다.” 이종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떻게 하지?” 박수현은 대답했다. “쿨하게 사과하시죠. 털고 가는 게 답입니다.”
 
박수현의 예언은 적중했다. 다음날 청와대에서 열린 5자 회동 말미에 박근혜는 이종걸에게 쏘아붙였다. “직접 뵈니 인상도 좋고 말씀도 잘하시는데 왜 그때 저보고 그년, 이년 그러신 거예요?” 좌중은 얼어붙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원유철 원내대표조차 표정이 굳어졌다. 정작 당사자인 이종걸은 딴생각에 팔려 박근혜의 ‘레이저빔’ 질문을 흘려 넘겼다. 김무성이 이종걸의 등을 치며 귀엣말을 했다. “이 대표, 이 얘긴 보통 (뼈가 있는) 말이 아니데이. 그냥 넘기면 큰일 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정신이 돌아온 이종걸은 “실수를 사과드립니다”라고 말했다. 박수현 말을 듣고 준비해둔 멘트였다. 박근혜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러나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다. 또 다른 ‘복수’가 진행됐다. 이종걸은 2시간 넘게 이어진 회동 내내 대화 내용을 받아 적느라 곤욕을 치렀다. 받아적기가 임무인 야당 대변인의 배석을 박근혜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박근혜의 말하는 속도는 이날 따라 유독 빨라 이종걸은 쉴새 없이 팔을 놀려야 했다. 견디다 못한 이종걸은 “휴대전화로 녹음 좀 하면 안 되겠느냐”고 청했지만, 박근혜는 “청와대를 뭐로 알고 그러세요. 여기가 법정인 줄 아세요”라며 일축했다. 보다 못한 문재인 대표가 “우리도 대변인을 배석시켜 받아 적게 해달라. 그쪽은 이병기 비서실장, 현기환 정무수석이 배석해 적고 있지 않나”고 했지만, 박근혜는 마이동풍이었다. 머쓱해진 문 대표는 “현 수석이 받아 적은 기록이라도 복사해 달라”고 했다. 박근혜는 “그건 더더욱 안된다”고 잘랐다. 부아가 돋은 이종걸은 발언 기회가 주어지자 30분 넘게 대통령을 향한 주문을 쏟아냈다. 이병기·현기환이 “그만하라”는 눈치를 줬지만, 이종걸은 본척만척했다. 5자 회동은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이종걸은 최고위원 시절인 2012년 8월 자신의 트위터에 “그들(새누리당)의 주인은 박근혜 의원인데 그년 서슬이 파래서…”라는 글을 올려 논란을 불렀다. 당시 이종걸은 새누리당뿐 아니라 당 출입 여기자들을 비롯한 여성계의 십자포화를 당했다. 이종걸이 회의에 나올때마다 두들겨 맞자 당시 당 대표였던 이해찬은 “이러면 당이 다친다. 해외로 몸을 피하라”고 명했다. 이종걸이 “갈 곳이 없다”고 하자, 이해찬은 자신의 몫이었던 독일 교민 사회 방문을 양보했다. 이종걸은 열흘 넘게 독일을 떠돌며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박근혜에겐 그런 ‘벌’로는 어림도 없었다. 대통령 된 뒤에도 ‘그년’ 발언을 가슴에 담아뒀다가 이종걸을 청와대에 초청한 자리에서 ‘뒤끝’을 작렬시켰다. 이종걸의 발언은 분명 문제가 있었지만, 3년 전 얘기를 끄집어내 야당 원내대표를 혼쭐낸 박근혜의 처신은 지나쳤고, 옹졸했다.
 
정권이 바뀐 지금도 공수만 뒤바뀌었지 똑같은 모양새가 재연되고 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그제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란 낯 뜨거운 얘기를 듣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자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는 “국가원수모독죄”라며 나경원을 윤리위에 회부해 손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국가원수모독죄란 ‘죄’는 유신 시절에도 없었다. ‘국가모독죄’가 1975년 만들어지긴 했다. 해외에서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을 처벌하는 법이었다. 이해찬을 비롯한 민주당 사람들은 이 법을 독재 악법으로 못 박고 싸운 끝에 88년 폐지를 끌어냈다. 30년 전 자신들이 없앤 악법을 자신들의 대통령을 지키겠다고 무덤에서 꺼내 부활시킨 격이다. ‘우리는 선, 너희는 악’이란 이분법이 빚어낸 내로남불의 전형이다. 김대중 청와대에서 민정수석과 정책기획수석을 지낸 김성재 김대중아카데미 원장조차 “여당이 과거에 탄압받던 틀(국가모독죄)을 다시 쓰는 건 잘못됐다”고 했다.
 
야당 원내대표 연설을 청와대가 직접 비판하고 나선 것도 마찬가지다. 국회에서 일어난 일은 여당에 맡기는 게 상식이다. 대통령이 해외순방 간 사이 청와대 보좌진이 ‘오버’한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여권 지도부는 화를 가라앉히고, 당 안팎에서 나오는 충고에 귀를 기울이기 바란다.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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