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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하노이 오찬장의 ‘설득의 심리학’

중앙일보 2019.03.13 00:26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하노이 회담 다음 날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던 메트로폴 호텔을 찾았다. 1층 정원과 수영장을 사이에 끼고 위치한 식당 ‘르 클럽’. 하노이 회담 결렬을 상징하는 ‘미완의 오찬’ 장소다. 깜짝 놀랐다. 오찬이 열렸다면 김정은이 앉았을 자리 바로 뒤편 책장에 ‘설득의 심리학’이란 큼지막한 한글 제목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치알디니 저서의 한글 번역본. 책을 꺼내 훑어보다 또 한 번 놀랐다. 김정은이 트럼프 설득에 실패한 원인이 압축돼 있었다. 베트남 하노이에, 메트로폴 호텔 오찬장에, 그것도 김정은 자리 바로 뒤에 그런 한글책이 놓여 있었다니, 아이러니다.
 
책에 거론된 ‘설득’의 최대 키워드는 ‘상호성의 원칙’. 대표적 사례가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었다. 당시 도청 아이디어는 공화당 선거 참모 리디가 내놓았다. 리디는 같은 해 1월 닉슨 재선 추진위원회 1차 회의에서 도청은 물론 정보 비행선, 미인계 아이디어를 냈다. 소요 예산 100만 달러. 기각됐다. 1주일 후 리디는 50만 달러짜리 수정안을 내놓았다. 또 기각. 3차 회의에서 리디는 25만 달러 제안을 제시했다. 닉슨의 특별보좌관 매그루더는 “처음엔 누구도 찬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100만 달러에서 50만 달러, 25만 달러로 축소되면서 모두 ‘그 정도라면…’으로 마음이 바뀌었다”고 회고했다.  
 
책의 결론은 이렇다. “그럴 듯하게 양보한 것처럼 보여라. 그럼 상대방이 양보한다. 무리한 요구만 하면 상대방은 내가 협상 의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김정은은 하노이에서 이걸 못했다. ‘완전한 제재완화’만 요구하다 거절당했다. 트럼프를 솔깃하게 할, 거절하지 못할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미국을 읽지 못했다.
 
트럼프를 설득시키지 못한 건 김정은뿐 아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남북경협 촉진을 통해 북미 관계를 개선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노이 회담 직후엔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와 ‘중재 역할을 해 달라’는 말을 7번이나 했다. 우리 역할이 커졌다”고 강조했다. 3·1절 기념사에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방안도 미국과 협의하겠다”고 한 발 더 나갔다.
 
이를 설득하러 워싱턴에 온 이도훈 평화교섭본부장이 서울로 돌아간 지 1시간 후 미 고위 당국자는 회견을 자청, “(금강산·개성공단) 제재 면제 검토를 안 한다”고 밝혔다. 미 정부가 이렇게 세게 남북경협사업에 ‘No’라고 말하는 걸 이번에 처음 봤다. 설득은커녕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 우리도 미국을 읽지 못했다. 워싱턴 조야에선 “한국이 ‘트럼프 랭귀지(언어)’를 아직도 이해 못 하고 있다”는 말이 돈다. 트럼프가 요청했다는 ‘중재 역할’은 ‘제대로 된 비핵화 설득’인데, 우린 그걸 ‘남북경협’으로 자가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김정은이야 핵 움켜쥐고 시간 벌며 내부 단속만 하면 크게 밑질 게 없다. 인민들의 가난에도 적잖이 내성이 생겨 있다. 설득에 실패해도 그만이다. 문제는 우리다. 하노이 결렬 이후 “제대로 한번 걸리기만 해 봐라”며 바짝 독이 올라 있는 미국에 남북경협이란 씨도 먹히지 않을 얘기를 꺼냈다. 그러니 설득은 고사하고 양국 간 균열만 자초했다. 외신을 통해 익히 알려진 ‘김정은 수석대변인’을 언급한 야당 대표에 “국가원수 모독죄”라 하는 집권당 태도도 다를 게 없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들려 오는 걸 안 들으려 한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봐야 하는 걸 안 보려 한다. 그런 정권의 자세는 외교를 꼬이게 한다. 복안(腹案)이 없으면 복안(複眼)이라도 있어야 북핵의 파고를 넘을 수 있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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