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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행·협박 없는 성범죄, 유·무죄 판단 근거는 무엇일까?

중앙일보 2019.03.12 06:00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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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사립대 졸업생인 김남수(가명)씨는 지인 소개로 이재은(가명)씨를 만나게 됐다. 이씨도 명문대 졸업생으로 김씨는 첫 만남에서 이씨에게 호감을 느꼈다. 첫 소개팅 자리였지만 둘은 3차까지 자리를 옮겨가며 술을 마셨고 헤어지기 전에는 김씨의 차 안에서 성관계를 가졌다. 김씨는 이씨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다음날 오후 1시까지 이씨와 이런 저런 SNS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그날 오후 4시 이씨가 김씨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술에 만취해 차 안에서 맺은 성관계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뤄진 성관계니 사과하라'는 내용이었다. 김씨는 이씨에게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이틀 뒤 이씨는 김씨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여성 혹은 남성을 물리적으로 제압하거나 폭행, 강압해서 성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처벌하는 것에는 사회적으로 대부분 이견이 없다. 법정형도 세다. 하지만 이씨의 사례처럼 눈에 보이는 폭행이 없는 성범죄 고소·고발 건도 상당하다. 과거 법원은 상대방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로 아주 강력한 폭행이나 협박이 있어야만 강간으로 인정하는, 이른바 '최협의의 폭행·협박설'을 고수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가해자의 폭력이 없어도, 피해자가 물리적으로 저항하지 않아도 성범죄 혐의에 대해 법원이 유죄로 판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씨는 몇주 전 수사 단계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헷갈려하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둘 만의 일’ 일 수밖에 없는 성범죄의 유·무죄를 수사기관과 법원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범죄 행위가 각각 다른 만큼 판결 기준도 다르게 적용된다. 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를 변호하거나 판단하는 최소한의 공통점들은 있었다. YK법률사무소의 김범한 대표변호사에게 자문을 받아 최근 법원과 수사 기관의 성범죄 판단 기준을 살펴봤다.
 
썸 타는 사이였다? "과거 성관계 유무도 판단 근거…처음이라면 유죄 심증 높아" 
 
최근 가장 빈번한 성범죄 고소 건은 ‘사귀는 사이에서 발생한 성폭행’이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사랑하는 사이거나, 최소한 ‘썸 타는’ 사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피해자는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사이거나, 사귄 적 없다고 일축한다. 부부나 연인 간의 강간도 유죄로 인정되는 만큼 관계 자체가 성범죄의 절대적인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지만, 성관계 ‘합의’ 유무가 명시적 증거로 드러나지 않았을 때는 과거 그 둘의 과거가 어떠했는지가 중요 기준이 된다. 
 
김 변호사는 “사귀는 사이였다면 그 둘의 성관계가 기존에 있었는지 유무도 중요하다”며 “피해자가 성폭행이라 주장하는 관계가 그들의 첫 관계였다면 유죄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고, 그렇지 않다면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무죄가 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성관계 직전과 직후에 나눈 메시지도 중요 증거다. 친밀한 대화 내용이 똑같이 유지됐다면 피고인에게 유리하다. 단 메시지 내용 중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성관계 사실에 대해 사과하는 내용이 있다면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될 수 있다. 최근 피해자 변호사들은 "사과를 받아내라"고, 가해자 변호사들은 "사과하지 말라"고 조언한다고 한다. 
 
성폭행 뒤 친근한 문자? "가해자에게 '잘 보여야' 하는 피해자 입장에서 충분히 가능" 
비서 성폭행 혐의로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서울중앙지법에서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비서 성폭행 혐의로 2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서울중앙지법에서 호송차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최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사례처럼 성폭행 뒤에 피해자가 친근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고 해도 유죄로 인정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안 전 지사와 피해자의 관계가 상하관계였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직장 직원-상사 관계인 경우 등 피고인이 유·무형의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면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아도 유죄로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이 경우는 가해자에게 여전히 잘 보여야 하는 피해자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해 판단한다”고 밝혔다. 
 
직장에서의 성범죄는 동료의 세평도 간접적 증거로 활용된다. 또 다른 피해자가 존재한다면 피해자의 법적 구제가 더 수월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 중 일부는 자신이 당한 일을 직장 동료의 단체채팅방 등에 올려 상담을 받으려 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다. ‘돈이나 받아내라’는 등 채팅방에서 피해자의 의견과 관계 없이 나온 조언이 가해자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참작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 변호사는 “피해가 발생하면 수사기관이나 변호사를 제일 먼저 찾아가는 게 좋다”고 말했다. 가해자로 지목된 피고인도 마찬가지다. 특히 유부남인 직장 상사 피고인의 경우 불륜 사실을 들키지 않기 위해 성관계 전후 메시지나 기록 등을 스스로 삭제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성범죄 고소 건에서 크게 불리해질 수 있다.  
 
술 취해 기억 안난다? "CCTV, 녹음 파일로 판단…'기억나지 않았다'만으론 유죄 인정 안돼" 
 
술 취한 후 발생하는 성범죄도 빈번하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둘 다 취해 있는 경우도 상당하다. 둘 다 기억이 흐릿하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CCTV나 주변인 진술 등이 주요 증거로 활용된다. 피해자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성범죄가 인정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피해자가 의사 표시를 하기 힘들 정도로 취해 있을 경우 성관계를 가졌다면 유죄로 인정된다. 모텔이나 엘리베이터의 CCTV 저장 유효 기간이 대부분 한 달 이내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빠른 시간 안에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게 중요하다. 
 
최근에는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수사기관에 성관계 전후가 녹음된 파일을 제출하는 경우도 늘었다. 합의하에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일부 인터넷 사이트에는 통화 중 휴대폰 녹음이 끊기는 것을 대비해 ‘비행기 탑승 모드’로 변경한 후 녹음하라는 내용까지도 올라와 있다. 김 변호사는 “성관계 사진이나 동영상을 촬영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녹음은 자기 자신이 포함돼 있는 것이기에 불법이 아니고 법정에서 증거로도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단 해당 녹음 파일을 수사기관이 아닌 제3자에게 전달한다면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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