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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음악인가] 클라라와 우리의 시대

중앙일보 2019.03.12 00:40 종합 27면 지면보기
김호정 문화팀 기자

김호정 문화팀 기자

멜로디가 첫 부분부터 달려나간다. 분명히 쇼팽일 것 같지만 중간에 등장하는 또 다른 주제는 건강하고 밝다. 클라라 슈만의 작품 번호 21번 로망스 중 3번째 곡으로 남편인 로베르트 슈만의 생일 선물로 만든 곡들 중 하나다.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의 모범이다.
 
독일 음악 계보에서 묵직한 자리를 차지하는 남편 때문인지 클라라는 늘 자신의 한계를 먼저 발견했다. 자기 작품에 대해 “미약한 음악” “너무 감상적인 곡”이란 표현을 쓰며 겸손과 비하의 경계에 섰다. 스스로 작곡을 하면서도 여성의 작곡이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클라라는 유럽 어느 도시에서든 흥행하는 연주자였지만 작곡가로서는 빛을 발하지 못했다. 적지 않은 작품이 지금도 거의 연주되지 않는 데는 지나쳤던 겸양이 한몫을 했다.
 
또 클라라는 너무 바빴다. 어려서는 신동 피아니스트로 주목받으며 뜨개질도 배우지 않았던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결혼 후엔 “연주가 끝나면 집안일로 온종일 보내는” 삶을 살게 됐다. 아이는 8명이었고 그중 4명이 클라라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말년의 남편이 병원에 입원한 후부터 클라라는 혼자 연주 여행을 다니며 피아노를 빌려 운반하고 공연장을 대여하고 음악회 티켓 인쇄까지 도맡았다. 한번은 연주 당일에 딸이 세상을 떠난 소식을 듣고도 무대에 올랐다. 21세기 워킹맘의 극단적 과거다.
 
시계를 200년 후로 맞춰본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는 5월마다 클래식 음악계의 최신 경향을 보여주는 클래시컬 넥스트가 열린다. 매년 혁신적인 단체나 개인을 시상하는데 올해의 주제는 여성이다. 클라라의 탄생 200주년 때문이다. 올해의 후보 리스트는 진보적이다. 브라질 여성 지휘자들의 모임, 젊은 여성 작곡가를 지원하는 미국의 실험, 여성 음악인들이 만든 스페인의 페스티벌 등이다.
 
하지만 이들의 현실은 클라라 슈만의 시대와 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클래시컬 넥스트의 후보 중 하나인 한국의 여성 현악4중주단 에스메 콰르텟은 “‘결혼은 할 거냐’ ‘여성들끼리 연주를 오래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또 영국의 음악잡지 스트라드는 이달 “재능 많은 한국 여성 연주자들이 국제 콩쿠르에 입상해서 좋은 남편감의 관심을 끌 기회를 만든다”라는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200년 동안 음악계와 청중은 진보했을까. 오랫동안 생각할 질문이다. 다만 클라라가 남긴 글귀 하나에 마음이 시리다. “살면서 단 몇 시간 동안만 무아지경의 창조 활동을 한다고 해도, 이를 능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김호정 문화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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