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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죄

중앙일보 2019.03.12 00:38 종합 28면 지면보기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엄마·아빠를 고소하고 싶어요!”
 

위험에 빠진 아이들 방치 고발하는 영화 ‘가버나움’
아동학대 방조하는 우리 사회 부끄러운 민낯 일깨워

열두 살배기 난민 소년 자인의 얘기다. 남들 다 보러 간 ‘극한직업’ 대신, 뭐에 씌웠는지 ‘가버나움’이란 영화와 마주했던 지난 설 연휴. 그 후 한 달여가 흐른 지금까지도 화면을 꽉 채웠던 그의 슬픈 눈빛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자인은 학교에 다닌 적도, 병원에 가본 적도 없다. 출생 신고조차 하지 않아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아이라서다. 부모의 보살핌은커녕 제 몸보다 훨씬 큰 가스통을 배달하고 환각제 가루를 탄 물을 팔아가며 밤낮으로 가족의 생계를 위해 혹사당한다. 그러고도 돌아오는 건 매질과 욕설뿐. 아끼던 여동생마저 이웃 남자에게 팔려갔다 숨지자 격분한 자인은 칼을 휘두른 끝에 수감된 뒤 외친다.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를 고소하겠다고.
 
차라리 눈을 돌리고 싶을 만큼 가슴 아픈 이 영화를 두고 혹자는 ‘빈곤 포르노(poverty porn)’가 아니냐고 꼬집는다. 동정심을 짜내려고 자극적인 묘사를 했다는 거다. “직접 와서 눈 똑바로 뜨고 보라. 실상은 더 끔찍하다.” 레바논 태생인 나딘 라바키 감독의 일갈이다. 그는 인구 다섯 명당 한 명이 난민인 나라에 살면서도 그 아이들이 겪는 고통을 무심히 지나쳐왔던 데 대한 반성으로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고백한다. 자인을 포함한 출연자 대부분을 비슷한 형편의 난민들로 캐스팅한 것도, 그들에게 연기 대신 평소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라고 주문한 것도, 현실이 영화보다 훨씬 영화 같기 때문이라나.
 
“위험에 빠진 아이들을 내버려 두는 것 자체가 범죄”라는 감독은 영화에서 자인이 고소하려는 건 자신의 부모뿐 아니라 아무 해법을 찾지 못한 채 수수방관하는 사회 전체라고 역설했다. 그리곤 던진 질문. “이게 과연 레바논만의 문제인가?”
 
#“엄마가 날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그 물음에 문득 여덟 살배기 혜나의 울먹임을 떠올렸다. 철없는 미혼모 엄마와 그의 동거남에게 처참하게 학대받던 소녀. 지난해 이맘때 방영된 드라마 ‘마더’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아이의 절박한 처지를 알아챈 여교사가 함께 도망친 끝에 온갖 난관을 이기고 모녀로 거듭나는 과정을 그렸다. 훈훈한 마무리였지만 초반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장면들로 논란이 됐다. 야구공을 던져 혜나의 귀를 맞추는 동거남, 가방을 휘둘러 딸의 머리를 내리치는 엄마, 결국 쓰레기봉투에 애를 담아 한겨울 길거리에 내놓곤 아무렇지 않게 외출하는 두 사람….
 
폭력 묘사가 지나치다는 비판에 작가 정서경은 “아이가 느끼는 공포와 고통을 시청자도 함께 통과하도록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말에 동의하든 말든 현실은 드라마보다 더 참혹하다. 그나마 혜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됐지만 2014년 3월 생후 26개월이던 정모 군은 PC방에 가려는 아빠에게 명치를 맞고 숨진 뒤 쓰레기봉투에 담겨 버려졌다. 혜나를 구하는 교사 역을 맡았던 배우 이보영은 “출산하고 엄마가 된 뒤 ‘원영이 사건’ 같은 뉴스가 끊임없이 나오는 걸 보고 책임감에 출연을 결심”했다. 그를 드라마로 이끈 원영이는 일곱 살이던 2016년 2월, 난방도 안 되는 화장실에 팬티 바람으로 갇혀 있다 목숨을 잃었다. 계모에게 맞아 여기저기 부러진 채 청소용 락스를 뒤집어쓰고 아빠가 찬물까지 끼얹어 방치한 탓이다. 그해 학대 받은 1만8700명의 아이들 가운데 죽음에 이른 36명 중 한 명이다.
 
놀랍게도 아동학대 가해자 열 중 여덟은 다름 아닌 부모. 이들 중 상당수는 너무 이른 나이에 아이를 낳곤 빈곤과 고립, 우울과 무기력에 시달린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혼모·미혼부에 대한 지원 부족이 낙태와 입양은 물론 아동학대까지 조장하고 있다는 거다. 우리 사회가 위기에 처한 어린 부모들을 지금처럼 외면하는 한 아이들은 계속해서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과연 이러고도 ‘0명대 출산율’이라며 호들갑을 떨 일인가.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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