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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세 감독·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끝은 어디?

중앙일보 2019.03.12 00:03 종합 23면 지면보기
딸의 결혼식 대신 백합 경연대회에 나간 과거의 얼(클린트 이스트우드).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딸의 결혼식 대신 백합 경연대회에 나간 과거의 얼(클린트 이스트우드).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농장에서 백합을 길러 내다 팔던 사업은 망했다. 가족에게는 진작부터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아왔다. 이런 남자에게 손쉽게 큰돈을 벌 기회가 생긴다. 트럭을 몰고 마약을 배달하는 일이다.
 

신작 ‘라스트 미션’ 식지 않는 열정
산전수전 다 겪은 마약배달원 연기

14일 개봉하는 영화 ‘라스트 미션’에서 가장 이채로운 설정은 80대 노인이 주인공이란 점이다. 장거리 운전에 능숙한 데다, 평생 교통위반 딱지 한 번 떼본 적 없는 87세 백인 남자 얼(클린트 이스트우드)은 막대한 물량을 연이어 배달하면서 마약밀매조직 두목이 주목하는 ‘우수 배달원’이 되어간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얼, 아니 연출과 동시에 주연을 맡은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존재감이다. 1930년생이니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 그가 앙상한 고목 같은 손으로 직접 운전대를 잡는 장면부터가 묘한 긴장감을 부른다. 하지만 ‘노인=약자’라는 건 이 영화에선 쓸데없는 편견이다. 얼의 만만치 않은 캐릭터는 희한한 스릴을 만들어낸다. 구시대 사람인 그는 젊은 흑인 부부 앞에서 서슴없이 ‘검둥이’란 말을 쓰는가 하면, 한국전쟁 참전용사다운 터프함을 느닷없이 발휘하며 마약밀매 조직원들과 적어도 말투로는 맞장을 뜬다. 반면 경찰 앞에선 ‘백인’이자 ‘노인’임을 활용해 위기를 모면한다. 나이만큼이나 세상 이치에 빤한 사람이다.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것은 ‘그랜 토리노’ 이후 10년만. ‘그랜 토리노’의 고집스러운 노인이 도덕적 책임감에서 직접 총을 들고 나섰던 것에 비하면 이번 영화는 한결 가볍게 전개된다. 얼은 돈도 돈이지만 가족과의 관계 회복이 큰 숙제다. 아내와 딸 모두 그와 말조차 섞으려 하지 않는다. 가족은 늘 뒷전이었던 얼이 손녀의 결혼 비용을 대는 등 마약 배달로 번 돈을 요긴하게 쓰는 과정이, 해괴한 노래를 부르며 운전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범죄는 범죄. 단속기관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가운데 얼이 배달 경로에서 이탈하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다.
 
이스트우드는 60년대 ‘석양의 무법자’ 같은 서부영화의 총잡이로, 70년대 ‘더티 해리’ 같은 무법 형사로 큰 인기를 누린 배우이자 그 누구보다 화려한 이력을 쌓아온 감독이다.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을 모두 받은 ‘용서받지 못한 자’와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비롯해 ‘미스틱 리버’ ‘아버지의 깃발’ 등 묵직한 도덕적 질문을 던지는 문제작을 여럿 연출했다. 80대에 들어서도 ‘아메리칸 스나이퍼’ ‘설리:허드슨강의 기적’등 꾸준히 수작을 내놓았다.
 
이런 전작들에 비하면 이번 영화는 상대적으로 소품처럼 느껴질 수 있다. 가족들이 얼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다소 안이하다 싶을 정도로 순탄하게 그려진다. 그럼에도 그저 노인이 아니라 87세의 개인으로서 얼을 부각시키는 연출, 죄책감이 전혀 없는 듯싶었던 그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모습은 이스트우드가 꾸준히 펼쳐온 캐릭터와 주제를 떠올리게 한다.
 
‘라스트 미션’은 한국 개봉 제목이고, 원제는 ‘The Mule’. 노새를 가리키는 말이자 마약 배달원을 뜻하는 속어다. 87세 마약 배달원의 실화를 다룬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기사가 영화의 바탕이 됐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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