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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살 영화감독이 직접 연기한 87세 마약배달원의 실화

중앙일보 2019.03.11 14:00
영화 '라스트 미션'. 2107년 현재의 얼(클린트 이스트우드)은 백합 농장이 망해 살던 집까지 압류당한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라스트 미션'. 2107년 현재의 얼(클린트 이스트우드)은 백합 농장이 망해 살던 집까지 압류당한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농장에서 백합을 길러 내다 팔던 사업은 망했다. 가족에게는 진작부터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아왔다. 이런 남자에게 손쉽게 큰돈을 벌 기회가 생긴다. 트럭을 몰고 마약을 배달하는 일이다. 
 14일 개봉하는 영화 '라스트 미션'에서 가장 이채로운 설정은 80대 노인이 주인공이란 점이다. 장거리 운전에 능숙한 데다, 평생 교통위반 딱지 한 번 떼본 적 없는 87세 백인 남자 얼(클린트 이스트우드)은 막대한 물량을 연이어 배달하면서 마약밀매조직 두목이 주목하는 '우수 배달원'이 되어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라스트 미션'
'그랜 토리노' 이후 10년만에
감독과 주연 겸한 새 영화

 
영화 '라스트 미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았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라스트 미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았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얼, 아니 연출과 동시에 주연을 맡은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존재감이다. 1930년생인 이스트우드는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 그가 앙상한 고목 같은 손으로 직접 운전대를 잡는 장면부터가 그 자체로 묘한 긴장감을 부른다. 
 흑인을 '검둥이'로 부르는 6·25 참전용사 
하지만 '노인=약자'라는 건 이 영화에선 쓸데없는 편견이다. 얼의 만만치 않은 캐릭터는 희한한 스릴을 만들어낸다. 구시대 사람인 그가 젊은 흑인 부부 앞에서 서슴없이 '검둥이'란 말을 쓰는 순간, 한국전쟁 참전용사다운 터프함을 느닷없이 발휘하며 마약밀매조직원들과 적어도 말투로는 맞장을 뜨는 순간은 관객의 가슴을 철렁하게 한다. 반면 경찰 앞에선 '백인'이자 '노인'임을 활용해 위기를 모면하는 걸 보면 나이만큼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빤한 사람이다.     
 
영화 '라스트 미션'. 2005년의 얼은 백합 컨벤션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우승을 차지한다.[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라스트 미션'. 2005년의 얼은 백합 컨벤션에서 큰 인기를 누리며 우승을 차지한다.[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것은 '그랜 토리노' 이후 10년만. 얼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그랜 토리노'의 고집스러운 노인 월터 코왈스키가 떠오른다. 하지만 코왈스키가 도덕적 책임감에서 직접 총을 들고 나섰던 것에 비하면 이번 영화는 한결 가볍게 전개된다. 
 일이 좋아 가족은 뒷전이던 가장
 사실 얼은 돈도 돈이지만 가족과의 관계 회복이 큰 숙제다. 아내와 딸 모두 그와 말조차 섞으려 하지 않는 것은 과거 얼이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밤낮없이 바빴기 때문은 아니다. 딸의 결혼식에 불참했던 것도 백합 경연대회에 나가 주변의 환호를 즐기기 위해서였을 뿐. 쉽게 말해 저 좋은 일 하느라 가족은 늘 뒷전이었다.  
 이런 얼이 이제 손녀의 결혼식 피로연 비용을 대는 등 마약 배달로 번 돈을 요긴하게 쓰는 과정이, 해괴한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운전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범죄는 범죄. 한편으로 마약 단속기관의 수사망이 좁혀오고, 다른 한편으로 얼이 배달 경로에서 이탈하는 뜻밖의 상황이 벌어진다.  
다이앤 위스트가 얼의 아내 앤 역할을 맡았다. 앤은 평생 가족이 뒷전이었던 얼과 같은 자리에 앉는 것조차 내키지 않아 한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다이앤 위스트가 얼의 아내 앤 역할을 맡았다. 앤은 평생 가족이 뒷전이었던 얼과 같은 자리에 앉는 것조차 내키지 않아 한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그동안 감독 이스트우드가 내놓은 뛰어난 영화, 묵직한 윤리적 문제를 다룬 걸작은 한두 편이 아니다. 1950년대 단역 배우로 데뷔한 그는 60년대 '석양의 무법자' '황야의 무법자' 같은 서부영화의 총잡이로, 70년대 '더티 해리' 같은 무법 형사로 큰 인기를 누리는 한편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로 일찌감치 연출 겸업에 나섰다. 이후 화려한 이력은 범접하기 힘든 수준이다. 변종 서부극 '용서받지 못한 자'(1992), 여성 권투선수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5)로 각각 아카데미 작품상·감독상을 모두 거머쥐었다. 범죄에 연루된 세 친구의 이야기 '미스틱 리버'(2003),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 역시 큰 호평을 받았다.   
아버지 얼을 지독히 실어하는 딸 역할은 이스트우드의 친딸 앨래슨 이스트우드가 연기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아버지 얼을 지독히 실어하는 딸 역할은 이스트우드의 친딸 앨래슨 이스트우드가 연기했다.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그랜 토리노'를 포함해 이런 전작들에 비하면 이번 영화는 상대적으로 소품처럼, 관객에 따라서는 실망스럽게도 느껴질 수 있다. 얼이 마약 두목(앤디 가르시아)의 멕시코 저택에서 파티를 즐기는 장면은 아마도 얼의 판타지에 가까운 묘사일테지만, 여성들의 수영복 몸매에 별 이유없이 지나치게 가까이 카메라를 들이댄다. 가족들이 얼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다소 안이하다 싶을 정도로 순탄하게 그려진다. 
 그럼에도 그저 노인이 아니라 87세의 개인으로서 얼을 부각시키는 연출, 죄책감이 전혀 없는 듯 싶었던 그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모습은 이스트우드가 꾸준히 펼쳐온 캐릭터와 주제를 연상시킨다.  
영화 '라스트 미션'.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라스트 미션'.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라스트 미션'은 한국 개봉 제목이고, 원제는'The Mule'. 노새를 가리키는 말이자 마약 배달원을 뜻하는 속어다. 87세 마약 배달원의 실화를 다룬 뉴욕타임스 매거진의 기사가 영화의 바탕이 됐다. 노인 범죄자의 실화를 다룬 영화로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은퇴작 '미스터 스마일'도 있다. 하지만 레드포드와 달리 이스트우드에게 '라스트'나 '마지막'은 쉽게 쓸 말이 아닌 것 같다. 감독 이스트우드는 80대에 접어든 이후에도 '설리:허드슨 강의 기적'(2016) '아메리칸 스나이퍼'(2014) 등 실화에 바탕한 문제작을 쉼 없이 내놓았다.  
영화 '라스트 미션' 촬영 현장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영화 '라스트 미션' 촬영 현장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사진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마약 단속기관 요원으로 등장하는 배우 브래들리 쿠퍼가 얼을 바라보는 눈빛은 그래서인지 남다른 존경심이 흐르는 것 같다. 브래들리 쿠퍼 역시 지난해 '스타 이즈 본'으로 성공적인 감독 데뷔를 했다. 얼과 사이가 나쁜 딸은 이스트우드의 친딸 앨리슨 이스트우드가 연기했다. 그는 "다 큰 후에 아버지와 연기한 건 처음인데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고 했다. 어쩌면 80대에 이만큼 결이 다양한 인물을, 80대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접하는 것 역시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경이로운 데가 있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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