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최저임금의 고약한 뒷면, 차별과 배척

중앙일보 2019.03.11 00:38 종합 27면 지면보기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논설위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논설위원

최저임금의 계절이 돌아왔다. 2020년에 적용할 최저임금이다. 최저임금법상 이달 말까지 고용노동부 장관이 최저임금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해야 한다. 이때부터 심의가 시작된다. 현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최저임금을 확 올렸다. 2년 동안 30%다. 또 올릴까. 소득주도성장을 포기했다는 얘기는 안 들린다. 그러니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20세기 초 흑인과 미숙련자 쫓아내려 최저임금 활용
21세기 한국, 저소득 미숙련자 고용시장에서 밀려나

임금은 기업이 준다.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최저임금은 다르다. 국가가 정해 기업에 강제한다. 기업 경영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소득을 올려 성장을 꾀하겠다는 정부로선 이보다 매력적인 수단이 없다. 인상만 하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니 말이다.
 
한데 시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고용시장은 휘청이다 못해 고꾸라졌다. 벌써 2년째다. 저소득층의 호주머니는 더 쪼그라들었다. 없는 사람이 더 못 사는 역차별이 심해진다. 일자리를 못 구하니 당연하다. 일을 해야 소득을 올리는데, 호주머니를 채울 방법이 없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런 현상은 최저임금이 처음 태동할 때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대체로 최저임금은 혹사당하는 저임금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그랬다. 최저임금이란 개념은 산업혁명과 맞물려 나왔다. 양털 스웨터가 대중화하면서 수요가 폭증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에 장시간 일했다. 땀에 전 공장, ‘스웨트 숍(sweat-shop)’ 노동자에게 적정한 임금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다. 최저임금제 태동의 이면에는 고약한 속셈이 도사리고 있다. 교육받은 숙련공, 즉 백인 위주의 고용시장을 만들려는 차별적 포석이다. 최저임금제가 미숙련공과 다른 인종의 일자리 진입을 막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얘기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를 풍미했던 페이비언주의(진보적 사회개혁주의)는 이런 경향이 강했다. 노동자의 영웅으로 추앙받은 영국의 시드니 제임스 웹은 “기혼 여성, 병약자 등은 기생충 같은 존재여서 지금 푼돈을 받으며 일자리에 붙어있는 것이다. 유능한 성인 남자의 임금을 기준으로 최저임금제를 강제로 시행하면 어떨까”라고 말했다, 교육받은 백인 남성을 제외한 나머지 계층을 고용시장의 기생충으로 취급했다.
 
1931년 제정된 미국의 최저임금법인 데이비스-베이컨법이라고 다를 게 없다. 이 법에 따라 모든 연방 계약은 노조가 정한 적정임금 이하로는 못 하게 했다. 언뜻 보면 파격적이다. 그러나 당시 흑인은 노조에 가입하지 못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고용시장에서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셈이다. 당시 하원의원 클레이턴 올굿은 “값싼 피부색의 노동자와 백인 노동자가 경쟁해야 하는 실정이다”고 말했다. 윌리엄 업셔 의원은 법안 청문회에서 “흑인 노동자가 너무 많아서 큰 문제”라고 했다. 존 커크란 의원은 “저임금 흑인이 백인 노동자를 밀어내는 데 대한 불만이 많다”고 했다. 최저임금법은 ‘그만한 임금을 주고 흑인을 쓰느니 백인을 쓰라’는 뜻이었다. ‘그 돈 주고,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미숙련공을 쓰겠냐’는 비아냥이기도 하다. 시장 기능을 이용해 교묘하게 특정 인종과 계층을 쳐내려 했다. 이로 인한 실업은 병폐가 아니라 건강한 경제의 상징으로 여겼다.
 
지금 한국의 최저임금이 딱 그런 모양새가 아닌지 걱정이다. 기술이 없는 저소득층을 시장에서 밀어내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해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은 저숙련 노동자의 실업률을 높이고, 여성과 청년에 부정적”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1월 고용지표에선 실업자가 122만명으로 19년 만에 최악이었다. 저소득층에서 실업률이 크게 상승했다.
 
최저임금제 탄생에 도사린 속셈이 정책의 선의(善意) 여부를 떠나 21세기 대한민국에서, 3만 달러의 나라에서 나타난다는 건 격에 안 맞다. 땀은 귀하다. 그 귀한 땀을 잘못된 정책이 허투루 취급하는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감히 철없이 무지개를 좇는 소년”(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 고려대 정년 퇴임사)의 감성으로 경제정책을 만질 때가 아닌 듯해서 하는 말이다.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논설위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