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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다…잊혀진 미주 한인 전쟁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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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재 중앙일보 국방부 출입기자 seajay@joongang.co.kr

그들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다…잊혀진 미주 한인 전쟁영웅들

중앙일보 2019.03.10 06:00
 
올해는 3ㆍ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기도 하다. 뜻깊은 해를 맞아 일제 강점기 때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런데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해외 항일투쟁사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상대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1909년 2월 1일 하와이와 미주 단체들이 합쳐져 대한인국민회(국민회)가 만들어졌다. 대봉보국회가 10년 5월 국민회에 참가한 뒤로 정식 이름이 국민회로 바뀌었다. 국민회는 미주 지역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원류다. 1909년 국민회 하외이 지방 총회 창립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박상하, 정원명(초대회장), 강용수(비서), 뒷줄 안원규(재무), 홍인표(비서), 이내수(부회장), 성용환(총무), 성명 미상.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1909년 2월 1일 하와이와 미주 단체들이 합쳐져 대한인국민회(국민회)가 만들어졌다. 대봉보국회가 10년 5월 국민회에 참가한 뒤로 정식 이름이 국민회로 바뀌었다. 국민회는 미주 지역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원류다. 1909년 국민회 하외이 지방 총회 창립회원들. 앞줄 왼쪽부터 박상하, 정원명(초대회장), 강용수(비서), 뒷줄 안원규(재무), 홍인표(비서), 이내수(부회장), 성용환(총무), 성명 미상.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장태한 UC 리버사이드 대학교 교수는 이렇게 설명했다.
 
“20세기 초 미주 지역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8000여 명이다. 대부분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건너갔다. 그리고 1000명 미만의 여성들이 ‘사진 신부’로 미국으로 갔다. 신부의 사진 한장만 보고 결혼했기 때문에 사진 신부라 불렸다. 미주 지역의 한인 이민자들은 인종 차별과 저임금, 고된 노동에서도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그리고 자녀를 가르칠 때 늘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일본과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배경에서 미주 지역 한인의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많은 한인 2세들이 자발적으로 미군에 입대했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목적도 있지만, 일본과 싸워 부모 세대부터 그토록 바라던 한국의 독립을 이루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안타깝게도 일본군과 싸우는 태평양 전선이 아닌 독일군과 붙는 유럽 전선에 투입됐다.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겨 헷갈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우성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은 “한인 2세들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활약을 하면서 미국은 한국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됐다”며 “이는 나중에 광복의 밑거름이 됐다”고 평가했다.
 
노백린 장군을 중심으로 1920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비행학교. 미주 한인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해 일본과 싸우려고 창설됐다. [사진 윌로우스공기념재단]

노백린 장군을 중심으로 1920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인 비행학교. 미주 한인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해 일본과 싸우려고 창설됐다. [사진 윌로우스공기념재단]

 
여기서 소개하는 미주 한인 전쟁영웅 세 사람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군으로 참전해 육·해·공에서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을 위해 싸웠다. 미국 사회에선 아직도 그들의 업적을 널리 기리고 있다. 이들 중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3ㆍ1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가 만들어진 1919년생이란 공통점이 있다.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대령(1919~2005)
 
김영옥 대령. [사진 위키피디어]

김영옥 대령. [사진 위키피디어]

 
김영옥 대령은 이승만ㆍ안창호와 함께 미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끈 항일 지사 김순권의 아들로 1919년 1월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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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군에 입대한 한인으론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으로 유명하다. 미국의 수훈십자 훈장, 프랑스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 이탈리아의 동성 무공훈장, 한국의 태극무공훈장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의 상관이었던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김영옥은 (미군 훈장 가운데 가장 높은) 명예훈장을 받아야 했다(수훈십자 훈장은 명예훈장 다음으로 높다)”고 말했다.
 
43년 1월 소위로 임관한 김영옥 대령은 제100 보병대대로 배치됐다. 이 부대는 일본계 미국인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미국의 일본계들은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을 위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면서 모두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리고 일본계 청년들은 조국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참전해야만 했다.
 
1942년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수용소행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사진 Online Archive of California]

1942년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수용소행 버스에 탑승하고 있다. [사진 Online Archive of California]

 
김영옥 대령의 100대대 배치는 한국인과 일본인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부대에 남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일본인 근처도 가지 말라’고 배웠던 그엿다.
 
유럽 전선에서 김영옥 대령의 용맹은 전설적이다. 44년 5월 16일 이탈리아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의 강력한 저항 때문에 발이 묶였다. 그는 일병 한 명만 데리고 지뢰밭을 기어가 독일군 진지로 잠입했다. 그리고 벙커 속에 잠자고 있던 독일군 2명을 포로로 잡고 무사히 귀환했다.
 
독일군 포로를 심문한 결과 연합군이 고려하고 있던 진격로에 독일군 탱크가 한 대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연합군은 단숨에 독일군 방어선을 뚫고 로마를 해방했다. 또 전사자 단 한 명도 없이 피사를 점령했다.
 
늘 앞장서는 김영옥 대령의 리더십 때문에 일본계 부하들은 그를 존경했다. 한 번은 치열한 전투 도중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적진에서 다치거나 포로로 잡힌 것으로 믿은 일본계 부하들이 전원 착검하고 독일군을 향해 돌격했다. 일본계 부하들이 발견한 김영옥 대령은 독일군 기관총 진지를 부수기 위해 수류탄을 던지기 바쁜 모습이었다.
 
2018년 8월 3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5번 프리웨이에서 김영옥 대령 기념 고속도로(Colonel Young Oak Kim Memorial Highway) 기공식이 열렸다. 고속도로에 그의 이름을 붙이듯 미국 은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을 높이 평가한다. [뉴시스]

2018년 8월 3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5번 프리웨이에서 김영옥 대령 기념 고속도로(Colonel Young Oak Kim Memorial Highway) 기공식이 열렸다. 고속도로에 그의 이름을 붙이듯 미국 은 전쟁영웅 김영옥 대령을 높이 평가한다. [뉴시스]

 
김영옥 대령은 독일이 45년 5월 항복하자 늘 바랐던 태평양 전선으로 이동할 참이었다. 그러나 일본 역시 그해 8월 15일 항복하면서 일본과 싸울 기회가 사라졌다. 그가 고향인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을 때 당시 LA 타임스는 ‘이탈리아 전선의 한국인 영웅 집으로 귀환’이라고 크게 보도했다.
 
전후 세탁소를 운영하던 김영옥 대령은 50년 6ㆍ25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을 찾았다. 그는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고 했다. 전투 임무가 아닌 통역 임무를 맡길까 했던 거짓말이었다. 51년 10월 소령으로 진급해 미 육군 최초의 비(非) 백인 보병대대장이 됐다. 인종차별을 당연히 생각했던 당시 미국에선 있기 힘든 일이었다.
 
김영옥 대령은 60년대 초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한국군 재건을 도왔지만 대신 장군 진급 기회를 놓쳤다. 72년 전역한 뒤론 한인 이민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봉사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의 주요 비영리 단체들은 그가 직접 만들었거나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설립한 것들이다.
 
2003년 김영옥 대령. [중앙포토]

2003년 김영옥 대령. [중앙포토]

 
9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의회에 위안부 결의안이 올라오자 일본계 사회가 조직적으로 반대했다. 이때 김영옥 대령은 옛 부하인 100대대 출신들을 설득했다. 100대대 출신들이 위안부 결의안을 지지했고, 결의안은 결국 채택됐다. 그가 ‘아름다운 영웅(Beautiful Hero)’이라 불리는 이유다.
 
 

영원한 에이스 프레드 오(1919~2015)
 
군복을 입은 프레드 오. [사진 Wall of Valor Project[

군복을 입은 프레드 오. [사진 Wall of Valor Project[

 
땅에 김영옥 대령이 있었다면, 하늘엔 프레드 오가 있었다. 그의 한국 이름은 오종구. 1919년 7월 15일생이다. 항일 운동을 하던 그의 아버지 오완주는 일본의 탄압을 피해 1900년 장인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한 뒤 미국에 도착했다. 이후 알래스카주→워싱턴주→캘리포니아주→오리건주→아이다호주로 옮겨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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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완주는 아이다호주에서 딸기ㆍ양파ㆍ수박 농사를 지었다. 당시 아이다호주엔 한인이 별로 없었다. 프레드 오는 학교의 유일한 한인이었다. 거의 매일 백인 아이들이 프레드 오를 괴롭혔다. 근처 일본계 학교로 전학하라는 제의가 있었지만 평생 일본을 증오했던 오완주는 허락하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전인 38년 프레드 오는 미군에 입대했다. 포병 부대에서 무선전신 부사관으로 복무했다. 그는 다섯 살 때 처음 본 항공기의 모습에 매료돼 조종사가 되고 싶었다. 미군의 항공대는 육군 소속이었다. 그러나 유색인종인 그에게 조종사의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는 “당시 ‘조종사는 불가능한 꿈’이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간절히 원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바행복을 입고 있는 프레드 오. [사진 위키피디어]

바행복을 입고 있는 프레드 오. [사진 위키피디어]

 
상관의 눈에 띄어 40년 드디어 육군 항공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졸업 이후도 한동안 지상요원으로 근무해야만 했다. 43년에서야 처음으로 전투기에 올랐다. 이후 아프리카ㆍ이탈리아ㆍ유럽 전선에서 155번 출격해 적기 6대를 격추하고 지상에 있는 17대를 격파했다. 다섯 대의 적기를 요격한 전투기 조종사를 에이스라 부른다. 그는 은성무공훈장(2회), 수훈비행십자훈장(2회), 동성무공훈장(1회), 공군 수훈장(19회)을 받았다.
 
프레드 오는 “나는 전투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혹자들은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향해 총을 쏘고 죽일 수 있냐며 묻지만, 그것은 내게 주어진 임무였다”고 말했다.
 
인종차별은 프레드 오의 군 생활 내내 따라다녔다. 한 번은 그의 상관이 그에게 아시아계는 비행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프레드 오는 임무가 너무 힘들고 두려워 백인으로 변했다”고. 상관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메리칸 비글(American Beagle)’이란 별명으로 용맹을 떨쳤던 제2 전투비행대대의 지휘관까지 올랐다.  
 
프레드 오는 군이 만류했지만 45년 소령으로 전역했다. 학업을 마친 뒤 치과를 개업해 2005년까지 시카고 지역에서 치과병원을 운영했다. 그는 한때 시카고 교민 사회에선 유명한 치과의사였다. 그러나 그가 제2차 세계대전의 에이스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프레드 오가 보여준 사진과 훈장들. [중앙포토[

프레드 오가 보여준 사진과 훈장들. [중앙포토[

말년의 프레드 오. [중앙포토]

말년의 프레드 오. [중앙포토]

 
재미 언론인인 이경원씨는 미주 한인 이민사를 다룬  『외로운 여정』에서 프레드 오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동안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영화와 책을 통해 역사의 한장을 장식해왔다. 그러나 알려진 대부분의 이야기는 젊은 백인들이 주인공인 영웅기일 뿐이다. 물론 오프레드(프레드 오)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할리우드에서 오프레드의 이야기는 관심 밖에 있다.”
 
 

트럼프도 인정한 안수산 여사(1915~2015)
 
1942년 군에 입대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삼남매. 왼쪽부터 안필영, 안필립, 안수산. [사진 위키피디어]

1942년 군에 입대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삼남매. 왼쪽부터 안필영, 안필립, 안수산. [사진 위키피디어]

 
지난해 5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시아 태평양계 미국인 문화유산의 달(Asian-Pacific American Heritage Month)’을 맞아 포고문을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포고문에서 “큰 시련이 닥쳤을 때도 변함없는 조국애와 소명에 대한 확고한 헌신을 통해 나라(미국)를 드높였다”고 찬사를 보낸 이가 있다. 바로 안수산 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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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산(미국명 수전 안 커디) 여사는 1919년 1월 1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었다. 도산 선생의 다섯 남매 중 셋째였으며, 딸 중에선 맏이였다.

 

안수산 여사는 어렸을 때부터 도산 선생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이 얼마나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 희생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아버지는 독립운동이나 임시정부 활동 때문에 집을 자주 비웠다. 안수산 여사가 투덜거리면 어머니 이혜련 여사가 늘 “아버지는 너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한국인의 아버지”라고 달랬다. 그 당시 안수산 여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에 고귀하고 훌륭하게 자라났다.
  
안수산 여사는 11살 때인 26년 도산 선생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당시 도산 선생은 임시 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로 떠났기 전 안수산 여사에게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라. 그러나 한국의 정신을 잊어선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도산 선생은 32년 일본 경찰에 체포됐고, 38년 옥중 사망했다. 안수산 여사는 “평생 아버지 사진을 5장 갖고 있는데, 그중 죄수복을 입은 사진을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말했다.
 
1918년 도산 안창호 선생 가족. 왼쪽부터 안필선, 도산 선생, 안수라, 안필립, 안수산, 이혜련 여사. [사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1918년 도산 안창호 선생 가족. 왼쪽부터 안필선, 도산 선생, 안수라, 안필립, 안수산, 이혜련 여사. [사진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안수산 여사는 어렸을 때부터 도산 선생이 만든 흥사단 일을 맡아야만 했다. 흥사단 본부가 그의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야구와 하키를 즐겼다. 특히 그의 야구 실력은 뛰어나 LA 시티 칼리지 재학 시절 대학 여자 야구팀 주장으로 뛰기도 했다. 포지션은 2루수.
 
안수산 여사는 40년 UC 샌디에이고 대학을 졸업했고, 42년 해군에 입대했다. 일본에 맞섰던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다. 미 해군 최초의 아시안계 여성이었다. 오빠인 안필립과 남동생인 안필영도 같이 입대했다. 안필립은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다. 안필영도 전쟁이 끝난 뒤 영화배우가 됐다.
 
안수산 여사는 인종차별에 더해 남녀차별과 싸워야만 했다. 미 해군 예비군 장교 후보생 학교에 지원했지만 한 차례 거부당했다. 기어이 입학한 그는 미 해군 역사상 첫 여성 장교가 됐다. 임관 후 후방 지원부서가 아닌 전투병과를 자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미군이 사용하던 링크. 초기 형태의 비행 시뮬레이터다. [사진 위키피디어]

제2차 세계대전 미군이 사용하던 링크. 초기 형태의 비행 시뮬레이터다. [사진 위키피디어]

 
그는 해군 전투기 조종사 교관이 됐다. 당시 미군은 링크(Link)라 불리는 초기 비행 시뮬레이터를 보유했다. 그는 링크 교관이었다. 한때 백인 전투기 조종사들이 아시아계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를 내쫓으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는 당당히 “(하늘이 아닌) 땅에선 내가 쏘라고 할 때 쏴야 한다”며 그들을 눌렀다.
 
안수산 여사는 나중에 포격술 장교(Gunnery Officer)로 진급했다. 범선 시절부터 함포를 다루는 중요한 자리를 뜻했던 포격술 장교는 당시 선임참모(XO) 다음의 직위를 의미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군정보국으로 옮겼다. 여기서도 인종차별 탓에 6개월 동안 암호해독 업무에서 배제됐다. 그러나 결국 능력을 인정받아 암호해독가로 활약했다.
 
NSA 시절의 안수산 여사. [사진 LA타임스 유튜브 캡처]

NSA 시절의 안수산 여사. [사진 LA타임스 유튜브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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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대위로 전역안 안수산 여사는 미 국가안보국(NSA) 비밀정보 분석요원이 됐다. 59년까지 NSA에서 일했으며 말년에는 부서장을 맡아 300여 명의 요원을 거느리기도 했다.
 
말년의 안수산 여사. [중앙포토]

말년의 안수산 여사. [중앙포토]

 
안수산 여사는 2015년 6월 24일에 향년 101세로 타계했다. 2016년 타임은 그를 ‘이름 없는 여성 영웅(Unsung women)’으로 뽑으면서 “신뢰할 수 있는 용감한 장교이자, 늘 인종차별을 겪었음에도 미국을 위해 봉사한 아시아계 미국인의 한 세대를 대표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이철재 기자 seaj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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