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안혜리의 시선] 미세먼지와 현 정부의 1만 5946시간

중앙일보 2019.03.08 00:54 종합 28면 지면보기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사람이 먼지(만도 못하)다. 사람이 뭔 죄냐.’ 사람이 먼저다(문재인 대통령의 2012년 대선 슬로건)를 패러디한 게시물이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넘쳐나는 걸 보니 최악의 미세먼지 국면을 맞은 문재인 정부의 느려터진 대응에 뜨악한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올해 들어 점점 길어지고 독해지는 미세먼지 테러에 국민들은 진작부터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삼한사미(3일 춥고 4일 미세먼지)로도 모자라 관측 이래 최고로 독한 미세먼지가 보름 이상 이어졌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데 비상 저감 조치를 알리는 안전문자가 닷새째 연속으로 이어지던 지난 3월 5일 오후 6시에야 대통령이 환경부 장관으로부터 그냥 보고도 아니고 ‘긴급’보고를 받았단다. 이러니 국민들의 불만이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비상조치” 대통령 한마디에 장관들 현장찾아 부산
‘세월호 늑장대처’ 비난 그들 국민안전에 시간만 허송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비상한 시기에 비상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정부의 책무”라는 대통령의 원론적인 한 마디에 갑자기 장관들이 바빠졌다. 전국의 초·중·고 학생들이 미세먼지에 무방비 상태로 개학을 맞아도 아무런 행보가 없던 유은혜 교육부 장관은 사진 잘 받는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실을 찾아 설치된 공기청정기를 구경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도 어린이집을 방문해 마스크 쓴 얼굴 사진을 찍고 돌아왔다. 국민의 고통에 대한 성찰 보다는 대통령 입만 바라보는 듯한 장관들의 부산 떠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역설적으로 미세먼지 문제 해결에 그간 이 정부가 얼마나 관심이 없었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미세먼지가 정말 정부의 주요 관심사라면 장관들이 지금껏 이렇게 손을 놓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저 미세먼지가 물러날 때까지 여론무마용 보여주기 행사 정도로 대응하면 되는 게 현 정부의 고민 수준이라는 걸 눈치 빠른 장관들이 간파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닐까.
 
문 대통령의 페이스북 계정만 봐도 알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만큼 직설적인 속내를 실시간으로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은 아니지만 문 대통령 역시 본인의 지지자와 긴밀하게 소통하는 SNS 정치를 중시하는 정치인이다. 여전히 하루에도 몇 번씩 올리는 페이스북 게시물이야말로 문 대통령의 진짜 관심사를 담고 있는 그릇이라 할만하다. 대선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페이스북을 훑어봤더니 미세먼지는 단 두 번 등장한다. 그것도 모두 대선 기간 중이었고 취임 후엔 아예 언급이 없다. 다른 사안과 비교할 때 미세먼지에 대한 무관심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압도적으로 많은 북한 문제뿐 아니라 가깝게는 유치원 문제에서부터 고(故) 노무현 대통령을 다룬 영화 ‘변호인’에 출연한 배우 김영애의 부고, 오랜 지지자인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신간 독후감, 자카르타 아시안게임 카누 용선 여자 500m 남북단일팀 선전 축하, 애완견 토리 소식까지 꼼꼼히 챙긴 문 대통령이 이상하리만치 미세먼지에는 게시를 아껴왔다.
 
지난 정부 때 미세먼지 대책이 미흡하다며 시위하던 환경단체들은 현 정부 출범 후 태도가 돌변했다. [사진 서울환경운동연합]

지난 정부 때 미세먼지 대책이 미흡하다며 시위하던 환경단체들은 현 정부 출범 후 태도가 돌변했다. [사진 서울환경운동연합]

후보 시절 행보를 감안하면 더욱 비교가 선명하다. 당시 문 대통령은 ‘국민이 만드는 대선 공약’이라는 캠페인을 통해 정책 제안을 받았다. 미세먼지가 가장 주목받은 이슈였다. 정책을 제안한 6만 명 가운데 무려 1만 명 이상이 미세먼지 대책을 강력히 촉구할 정도였다. 이를 토대로 2017년 4월 13일 미세먼지 30% 감축과 대통령 직속 특별기구 신설, 한중 정상급 주요의제 격상을 골자로 한 미세먼지 대책을 발표했다. 당장 30% 감축은 어렵다 해도 특별기구 신설이나 중국의 협조를 끌어내는 외교적 노력은 문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지난 2년 동안 얼마든지 진척이 가능했을 일이다.
 
하지만 당선 후 취임 첫 일정인 2017년 5월 10일 오전 8시부터 청와대에서 ‘긴급’ 보고를 받았다는 지난 5일 오후 6시까지 무려 665일, 그러니까 1만 5946시간 동안 문재인 정부는 미세먼지와 관련해 사실상 아무 진전도 이루지 못했다. 그 사이 환경단체들로부터 F 학점이라고 융단폭격을 맞은 이전 박근혜 정부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땜질 대책만 몇 번 내놨을 뿐이다.
 
그런데도 견제를 해도 시원찮을 환경단체는 정부 대변인 역할을 하는 듯한 모습이다. 환경운동연합이 대표적이다. ‘미세먼지로 인한 건강 피해 인식이 민감해져 지금 수준의 미세먼지 세상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고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이 단체의 공동대표는 최근엔 ‘미세먼지 기준이 너무 높아 국민을 공포와 불안에 떨게 만들어 정신 건강을 해친다’며 기준 완화를 주장한다. 박근혜 정부 시절 방독면을 쓰고 도심 한복판 시위를 벌이던 또 다른 환경단체는 미세먼지 수치가 더 악화한 지금은 ‘미세먼지 특별법 무엇이 달라질까’라는 관변지 같은 게시글을 홈페이지에 띄울 뿐이다.
 
‘세월호 7시간’을 내세워 국민 안전과 관련한 정부의 부재와 존재이유를 추궁하던 게 현 정부 사람들이고 지금의 관변 환경 단체들 아닌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채 속절없이 보낸 문재인 정부의 1만 5946시간 앞에 부끄럽지도 않은가.  
 
안혜리 논설위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