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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타자는 끝났다…이제부터 ‘광속 투수’ 하재훈

중앙일보 2019.03.08 00:03 경제 7면 지면보기
미국·일본에서 외야수로 뛴 SK 하재훈은 투수로 전향한 뒤 최고 시속 155㎞를 찍었다. [연합뉴스]

미국·일본에서 외야수로 뛴 SK 하재훈은 투수로 전향한 뒤 최고 시속 155㎞를 찍었다. [연합뉴스]

“투수 하재훈을 지명하겠습니다.”
 

미국·일본서 10년, SK 중고 신인
외야수 미련 탓에 투수 제안 거절
“이젠 가족 생각하라” 설득에 결심
전향 6개월 만에 마무리투수 후보

지난해 9월 10일 열린 KBO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서 SK 와이번스는 2라운드에 하재훈(29)을 선택했다. 전체 16번이었다. 하재훈은 자신의 이름이 잘못 불린 줄 알았다. 드래프트 신청서에는 포지션을 ‘외야수’로 써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났다. 정규시즌 개막을 2주 앞둔 시점, 하재훈은 KBO리그 최고의 파이어볼러로 주목받는다. 일본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찍은 최고 스피드가 시속 155㎞다. 하재훈은 지난 1일 LG와 평가전 6회에 등판해 김현수, 토미 조셉, 채은성으로 이어진 타선을 1이닝 무피안타 무실점으로 요리했다. 4일 한화 평가전에서도 8회에 나와 세 타자를 무피안타(2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았다. 실전 최고 스피드는 1일 시속 151㎞, 4일 시속 153㎞였다.
 
공만 빠른 게 아니다. 공의 회전이 좋아 슬라이더와 커브도 위력적이다. 본격적으로 투수를 한 건 올해가 처음이지만, 피칭훈련은 이미 꽤 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짱도 두둑하다.
 
치밀한 계산 아래 불펜을 운영하는 염경엽 SK 감독은 “하재훈이 매우 좋은 페이스를 보였다. 여러 장점이 있는 투수”라면서도 “처음부터 무리시키지 않을 것이다.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줄 것”이라고 말했다. 신중한 염 감독이 당장 마무리로 쓸 것 같진 않지만, 하재훈이 SK 불펜의 비밀병기인 건 틀림없다.
 
프로에 와서 포수나 야수가 투수로 전향한 경우는 드물게 있었다. 그 중 20대 후반에 성공한 사례는 현대에서 3루수로 활약했던 권준헌(48)뿐이다. 1999년까지 타자로 10년을 뛴 권준헌은 만 29세에 불펜투수로 전향해 9년간 19승11패, 29세이브 40홀드(평균자책점 3.32)를 기록했다.
 
하재훈의 이력은 훨씬 극적이다. 2009년 마산 용마고를 졸업한 그는 KBO리그를 선택하지 않고 미국 시카고 컵스와 계약했다. 당시 사이닝보너스(계약금)가 10만 달러(약 1억1000만원)였다. 좋은 대우는 아니었다. KBO리그 드래프트에서 중상위 지명이 가능했던 하재훈의 첫 번째 모험이었다.
 
하재훈은 차근차근 올라갔다. 2012년 퓨처스게임(마이너리그 올스타전)에 출전했고, 2013년에는 메이저리그 직전 단계인 마이너리그 트리플A에서 뛰었다. 타격이 좋았고 발도 빨랐다. 무엇보다 중견수 자리에서 던지는 ‘총알 송구’는 트리플A 최고 수준이었다.
 
2013년 말 손목 수술을 받은 하재훈은 2014년 메이저리그에 도전했다. 더블A 경기에 재활 차 등판했던 클레이턴 커쇼(31·LA 다저스)를 상대로 2루타를 포함, 2안타를 때린 적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기회를 잡지 못했다. 부상 여파로 2014년 말 40인 로스터에 들지 못했다. 이어 2015년 말 사실상 방출됐다. 당시 컵스 구단은 “어깨가 좋으니 투수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하재훈은 피칭 훈련을 하다가 한국 복귀를 결심했다.
 
KBO 규약은 해외파 복귀 선수에게 ‘2년 유예’ 조항을 적용한다. 아마추어 선수들의 무분별한 해외진출을 막기 위한 제도다. 이 기간에는 미국·일본 프로팀과 계약할 수 없다. 하재훈은 2016년 일본 독립리그(도쿠시마 인디고 삭스)에서 뛰었다.
 
하재훈이 6할대 타율을 기록하자 일본 프로팀 야쿠르트가 계약을 제안했다. 프로 계약을 하면 ‘2년 유예’는 다시 처음부터 적용된다. 이 계약을 받아들인 게 하재훈의 두 번째 모험이다. 하재훈은 야쿠르트 1군에서 17경기(타율 0.225)밖에 나서지 못했다. 2017년 다시 일본 독립리그로 돌아갔다. 외야수로 52경기, 투수로 13경기(7세이브 무실점)를 뛰었다. SK는 지난해 일본으로 날아가 ‘투수 하재훈’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지난해까지는 하재훈에게 외야수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당시 SK 단장이던 염 감독은 “어느 팀이나 외야수는 포화 상태다. 넌 투수로서 재능이 훨씬 뛰어나다. 이제 가족(아내와 두 아들)을 생각하라”고 설득했다. 서른, 타자는 끝났다. 하지만 투수로서 새 인생이  열렸다. 먼 길을 돌아온 그에게 지난 10년이 아쉬울 만도 하다. 그러나 하재훈은 “마흔 살까지 던지고 싶다. 꼭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그의 세 번째 모험이 시작된다.
 
김식 기자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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