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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듀스포인트"…지금 그 말이 와닿는 까닭

중앙일보 2019.03.04 13:00
[더,오래]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21)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맞나 보다. 월드컵이 열릴 때는 온 세상이 축구 팬들로 가득한 거 같더니 야구시즌에는 모두 다 야구팬으로만 보이니 말이다.
 
얼마 전, 친정 조카가 탁구를 시작한다는 말을 들은 나의 첫 반응은 '요새도 탁구가 인기 있어?' 였다. 마치 내가 관심 없는 건 모두가 그럴 거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생각해 보니 탁구는 나의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 보따리에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오늘 그림 에세이는 그동안 나만 몰랐던 동네탁구장의 활기찬 모습에 대한 것이다.
 
동네탁구클럽에서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 by 갤럭시탭S3, 아트레이지 사용. [그림 홍미옥]

동네탁구클럽에서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 by 갤럭시탭S3, 아트레이지 사용. [그림 홍미옥]

 
음~ 그러니까 1970년대 중반쯤? 당시엔 국민 학교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가 선물해준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우승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던 시기에 새로 부임하신 젊은 선생님은 탁구부를 만들었다. 빈 교실 삐거덕거리던 마룻바닥 위에서 어설프게 시작한 탁구부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때는 학교뿐만이 아니고 거리엔 어김없이 탁구장이 생기곤 했는데 그 이름들은 한결같이 '금메달' 혹은 '필승', '승리'라는 간판을 걸고 나름 성황 중인 시절이었다. 운동이라고는 항상 꼴찌수준이던 난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탁구부들이 훈련하던 교실을 기웃거렸다. 운 좋게 탁구대가 비면 재미 삼아 탁구를 해보기도 했고, 라켓이란 발음조차 생소했던 터라 '탁구빠따'라는 국적 불명의 단어를 쓰면서 재미를 붙여가곤 했다.
 
당시 학교엔 소문나게 탁구를 잘 치는 학생들이 몇 명 있었다. 그 중, 짙은 눈썹에 쇼트커트를 한 예쁘장하던 한 학년 아래의 소녀는 특히 그 실력이 뛰어나 그의 탁구연습을 보려고 체육실 창문을 흘끔거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훗날 그 소녀는 88올림픽 탁구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고 전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되는데 바로 양영자 선수다. 지금까지 나로 하여금 '에헴 저 금메달리스트가 우리 학교 후배야! 라며 잘난 척을 하게 만든 추억의 주인공이다.
 
현정화(좌)와 양영자(우) 선수. 양영자 선수는 학교 후배로 지금까지 나에게 잘난척을 하게 만든 추억의 주인공이다. [중앙포토]

현정화(좌)와 양영자(우) 선수. 양영자 선수는 학교 후배로 지금까지 나에게 잘난척을 하게 만든 추억의 주인공이다. [중앙포토]

 
금메달보다 가까이에 있는 생활탁구
2019년 봄을 시샘하듯 바람이 매섭던 날, 그 옛날 마룻바닥 교실 탁구부를 기웃거리던 난 '탁구클럽'이란 멋진 이름의 탁구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조카의 연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바깥 날씨와는 다르게 후끈한 실내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탁구를 즐기고 있었다. 그곳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금메달에 빛나는 유승민 선수가 대표로 있는 곳이다. 중국 선수와의 숨 막히는 결승전으로 전 국민을 행복하게 해 주었던 그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단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유승민 현 IOC 위원(가운데).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남자단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유승민 현 IOC 위원(가운데).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유명선수가 하는 곳이니 일반인들은 명함도 못 내밀까? 하는 선입견으로 들어선 그곳엔 예상과는 다르게 유치원생부터 어르신까지 면면이 다양했고, 실내는 짧은 함성과 핑.퐁.핑.퐁 거리는 경쾌한 울림으로 가득했다.
 
겨울방학을 이용해 탁구장에 나온 턱수염이 거뭇해지기 시작한 남학생들부터 먹음직스런 간식거리를 챙겨온 푸근한 탁구동호회 회원들, 엄마를 따라서 온 귀여운 아기들까지 면면이 다양했다. 그런가 하면 퇴근 후에 부랴부랴 뛰어온 직장인 부부도 있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까지 저마다 열심히 탁구를 즐기고 있었다.
 
아까 입구에서 보았던 현수막의 문구인 신나는 생활체육이 바로 이런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무슨 대회만 목표로 하는 특수계층의 체육이 아닌 과정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신명 나는 그런 거 말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본 탁구장의 풍경은 이처럼 정겹게 손을 내밀며 어릴 적 동네탁구장에 다시 놀러 온 기분마저 들게 했다. 그리고 여전히 통통 튀는 활기참으로 세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인생은, 세상은 듀스 포인트, 나에게도 역전의 기회가… 
자투리 시간을 내어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 [사진 홍미옥]

자투리 시간을 내어 탁구를 즐기는 사람들. [사진 홍미옥]

 
작가 박민규의 『핑퐁』이라는 소설에선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역사란 건 스코어보드에 지나지 않아, 즉 탁구의 거대한 기록물이지. 그리고 세계는 언제나 듀스 포인트야'
 
가장 작은 공으로 서로를 응시하며 폼을 만들고 주고받는 탁구를 인생에 빗대어 말하던 문장들이 인상적이었던 소설이다. 누군가는 질서를 어지럽히고 또 누군가는 그걸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그래서 세상은 듀스 포인트의 균형을 이어간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러고 보니 듀스 포인트의 균형은 탁구경기뿐만 아니라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장안의 화제를 몰고 종영한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처럼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달려가는 이기적인 인간 군상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을 위해 성심껏 봉사하는 이들도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인생은 미약하나마 듀스 포인트가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소설 『핑퐁』 속의 대사처럼 말이다.
 
이곳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동·하계 올림픽을 개최했던 스포츠 강국임에도 체육 활동의 기회마저 접하기 힘든 소외계층이나 차상위 계층, 장애우,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행사를 개최하곤 하는데, 짧은 기간이지만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더할 수 없는 보람과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갑자기 탁구장의 핑.퐁 소리가 더 경쾌하게 들리는 건 이런 따스한 마음들이 함께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두드림 스포츠단의 꿈나무 선수와 코치. [사진 홍미옥]

두드림 스포츠단의 꿈나무 선수와 코치. [사진 홍미옥]

 
살다 보면 허구한 날 밀리기만 하는 인생에도 언젠가는 기회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그럴 땐 탁구의 듀스 포인트에 서 있는 것처럼 역전의 매치포인트를 향해 열심히 뛰어가는 거다. 강력한 서브와 부드러운 리시브로!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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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미옥 홍미옥 스마트폰 그림작가 필진

[홍미옥의 폰으로 그린 세상] 둘도 없는 친구인 스마트폰과 함께 세상 이야기를 그리는 중년 주부.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 중년도 아직 늦지 않았음을 그림을 통해 알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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