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규제OUT] "게임 탓에 흉악범죄 벌어진다? 게임은 질병이 아냐…근거 없는 접근법"

중앙일보 2019.03.04 10:00
인지과학자 이경민 서울대 교수 인터뷰
지난달 15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방준혁 넷마블 의장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게임업계가 당면한 현안을 조목조목 풀어놨다. 이들은 ▶게임장애 질병코드 등재 반대 ▶강제 셧다운제 폐지 ▶온라인 게임 결제 한도 폐지 등을 언급했다. 김 대표는 문 대통령의 왼쪽 바로 옆자리에 앉아서, 방 의장은 대통령과 산책하는 동안 이 같은 업계 현안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지난달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9년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기업인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문 대통령 오른쪽 앞줄에 앉은 사람이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가운데)이 지난달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19년 기업인과의 대화'에서 기업인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문 대통령 오른쪽 앞줄에 앉은 사람이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이해 관계로 입장 갈리는 '게임중독' 질병 논란
올해 국내 게임 업계가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주제 역시 '게임 규제 완화'다. 국내 게임 업계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대통령 앞에서 직접 업계의 어려움을 호소할 만큼 정부발 각종 규제가 게임 산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게임장애 질병코드 등재'와 관련해서는 국내에서도 찬반 논란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오는 5월 열리는 세계 보건 총회에서 게임 장애(Gaming disorder)를 정신건강질환의 일종으로 등재하는 국제 질병 분류 개정안(ICD-11)을 발의할 예정이다.  
개정안이 WHO를 통과하면 우리나라의 한국표준질병분류(KCD)도 ICD 개정에 맞춰 바뀔 것으로 보인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WHO에서 게임 장애를 질병화하는 것으로 확정하면 이를 바로 받아들이겠다"고 공언했다. 게임 장애가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면 진료비 청구와 건강보험 적용이 가능하게 된다.
 
전문가 진단 사라진 곳에 이념과 로비만 판쳐 
게임 업계는 WHO와 보건복지부의 방침에 반대하고 있다.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볼 임상 근거가 부족하고, 개인 취미를 정신질환으로 분류하는 것은 위험한 데다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퍼져 산업 전체가 위축될 것이라는 이유를 든다. 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 발표에 따르면 WHO에 게임 장애가 질병으로 등재되면 국내 게임 산업이 3년간 수조 원에 이르는 피해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반대로 학부모·교육 관련 단체 등은 게임 장애의 심각성을 주장하며 정부 방침에 찬성한다.
 
서울대 의대 신경과 교수이자 인지과학자인 이경민 서울대 인지과학연구소장은 지난달 1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게임 장애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자료를 기반으로 사회적 담론을 형성해야 하는 문제인데 국내에선 정파적 논리, 정치적 이익을 기반으로 한 찬반 주장만 난무한다"고 지적했다. 뇌과학 권위자인 이 교수는 수년 전부터 게임이 인간에 미치는 각종 효과와 요인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왔다.
이경민 서울대 인지과학연구소장

이경민 서울대 인지과학연구소장

 
게임 중독·장애를 질환으로 분류하게 되면 앞으로 게임은 술·마약과 동일 선상에 놓아야 하는 것일까.
이 교수는 "과용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게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터넷부터 시작해 모바일·스마트폰·소셜미디어 등도 과용하면 문제가 된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은 각종 디지털 기술에 중독돼 장애가 발생하는 것인데 게임만 타깃이 됐다. 사람들이 흔히 '게임 중독'이라 일컫는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임이 비디오 게임인지, 온라인 포커·고스톱과 같은 갬블링 게임인지도 애매모호하다. 명칭부터 큰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게임 중독 국가관리" vs "객관·공정한 논의 우선" 
그는 이어 "질병 코드로 등재할지 여부는 의료계에서 해야 하는 얘기인데, 이를 사회적 이슈로 연결해 다른 담론으로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게임에 대해 가뜩이나 부정적으로 보고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WHO의 권위를 이용해 본인들의 정치적 논리를 뒷받침하는 데 이를 중요한 근거로 활용한다"고 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게임 장애의 질병코드 등재 여부가 논란이 됐다.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최도자 바른미래당 의원은 "게임 중독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가 필요하고 게임 산업은 카지노·경마처럼 매출 일부를 중독예방치료기금으로 부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게임의 산업적·문화적 측면을 고려하고, 뇌과학·인지과학 발달의 측면에서도 바라볼 필요가 있는데 부정적 여론에 휩쓸려 이에 대한 논의조차 못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게임의 여러 효과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담론의 장이 형성돼야 하는데, 게임 규제론자들이 정파적 논리에 따라 국감장에서 한두 마디 던지는 것에 논의가 이끌려다니는 형국"이라고 지적했다. 
(기사 내용과 사진은 관계 없음) [중앙포토]

(기사 내용과 사진은 관계 없음) [중앙포토]

 
서구권 "질병으로 분류하면 안된다" 반대 입장
게임 장애 문제에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정부 부처들도 입장은 제각각이다. 복지부는 WHO를 따라 질병코드 개정을 앞당기겠다는 입장이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이에 반대한다. 한국 게임은 전세계 PC 게임과 모바일 게임 시장에서 각각 3,4위를 차지하는 등 입지를 굳히고 있지만, 정작 자국에서는 게임 규제론으로 힘을 못펴고 있다.
 
이 교수는 "정부 부처들도 논리 없이 주장만 한다. 지난 2년간 민관합동 기구인 게임이용자보호센터의 센터장으로 활동했지만, 이런 중요한 정책 사안을 논의할 기회는 없었다. 정식 논의라고 할 만한 자리는 없다 보니 관료들에 대한 로비가 더 힘을 얻게 된다"고 비판했다.
 
게임 중독을 질병 코드로 등재하는 문제를 놓고 유럽·미국 등은 연이어 WHO에 반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영국의 게임·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지원하는 무역 기구인 영국 인터렉티브 엔터테인먼트 연합(UKIE)과 유럽 인터랙티브 소프트웨어 협회(ISFE)는 지난해 12월 "게임 장애가 질병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분명한 증거가 뒷받침돼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오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게임을 과용하는 것은 하나의 증상이지, 이 자체가 질병은 아니다"며 "외국에서는 게임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훨씬 적고, 게임을 많이 한다고 해서 병적인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으며 게임 자체를 중독 물질로 정의하고 나쁘다고 판단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게임을 과용하게 되는 사회적 스트레스가 무엇인지에 대한 연구가 선행된다"고 덧붙였다.
 
흉악범이 전날 햄버거 먹었으면 햄버거 탓할건가 
그는 또 "흉악범을 분석할 때 '게임을 많이 해서 그렇다'는 논리도 한국에서만 나온다. 흉악범이 그 전날 햄버거도 먹었고, 피자를 먹었다고 해도 이를 범죄의 원인으로 보지 않는다. 정확히 밝혀진 상호연관성이 없는데 게임을 많이 해서 폭력 행위를 했다는 것도 잘못된 접근"이라고 비판했다.
 
게임 장애가 질병코드로 등재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교수는 과잉 진단, 과잉 진료를 우려했다. 
그는  "주의력이 떨어진, 사회성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게임에 빠져들 수 있는데, 왜 게임에 빠졌는지 원인을 찾지 않고 '저 아이는 게임중독'라고고 정의하고 방치해두면 문제와 증상은 더 커진다. 병원에서 '게임중독'을 비보험으로 처리하면서 일부 의료진들에게 수익성 괜찮은 장삿거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 교수는 지난해 9월 국내 심리학·게임학·소아정신과·미디어영상학 등 각계 전문가 17명과 함께 '게임과학포럼'을 만들었다. 게임과학포럼은 게임의 효능에 대한 각종 연구, 사례를 수집하고 게임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여러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목표다.그는 "비디오 게임을 필요한 모든 놀이는 인지·행동·감정·사회성 발달에 필수적인 요소다. 초등학교 저학년생이 감각·운동·시청각 기술을 연마하는 게임을 하면 인지 발달에 도움이 된다. 청소년들이 롤플레잉 게임을 하는 것은 사회성을 연습하는 것이다. 놀이터에서 노는 것과 같은 원리다. 제대로 놀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자기통제력이 약하다"고 했다.
그는 이어 "우리나라에서 유독 게임 중독·과용에 관한 논문이 많이 나온다"며 "국가 차원에서 게임 규제론을 주창하고 있는 중국에서 한국의 게임 관련 논문을 좋아하고 자주 인용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하선영 기자 dynamic@joongang.co.kr
공유하기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