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코노미스트] 베네수엘라에 러브콜 보내는 중·러 견제?

중앙일보 2019.03.03 00:02
“세계의 경찰 아니다” 포기 선언하고도 개입… ‘21세기형 먼로주의’ 선언·실행
 

미국이 베네수엘라 사태에 개입하는 이유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8일(현지시간) 국립군사의료센터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백악관에 도착하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의 경찰 아니다“라고 선언하고도 유독 베네수엘라 사태에는 적극 개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 8일(현지시간) 국립군사의료센터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백악관에 도착하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의 경찰 아니다“라고 선언하고도 유독 베네수엘라 사태에는 적극 개입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미국은 언제까지나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할 순 없다. 미국은 호구(sucker)가 아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26일 이라크 바그다드 서쪽의 알아사드 공군기지를 전격 방문한 자리에서 깜짝 선언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경찰’로 불리며 전 세계의 분쟁과 갈등에 군사적·외교적·경제적으로 개입하던 미국의 20세기식 외교 노선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이라크에서 “우리는 자신들을 보호하려고 우리의 엄청난 군대를 이용하는 국가들에게 더는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그들은 그 대가로 돈을 지불하지 않는다. 이제는 돈을 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전 세계에 걸쳐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이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에도 가 있다”며 “이는 솔직히 말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막대한 비용을 쓰는 미군을 동원해 동맹국을 지원하는 일을 세금 낭비라고 비판한 셈이다.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 발표 충격 일파만파
이 발언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19일 내전 중인 시리아에 주둔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갑자기 발표한 충격이 일파만파로 번지는 상황에서 나왔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5년 시리아 동북부 터키 국경지대에 2000여 명의 지상군을 파병해 지금까지 유지해왔다. 시리아 주둔 미군은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와 싸우는 쿠르드족 민병대인 시리아민주군(SDF)의 훈련을 주로 맡아왔다. 시리아 철군을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트럼프는 이날 “IS를 상대로 승리했다”고 주장하며 철군을 발표했다. 지난 12월 20일 뉴욕타임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주둔 미군의 절반인 7000여 명의 철수를 결정했다고 보도했다. CNN이 트럼프의 철군 결정을 두고 “세계 최강 군사력의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불안한 지역에서 발을 빼기로 한 이 결정은 동맹을 버리고 한 지역을 지정학적 경쟁자에게 넘기는 것이며 세계사에서도 드문 일”이라고 대놓고 비난했지만 트럼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트럼프의 시리아 철군 결정에서 소외된 것으로 알려진 제임스 매티스 당시 국방부 장관은 지난 12월 20일 “동맹 없이는 미국의 이익을 지킬 수 없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IS 격퇴를 위한 글로벌 동맹 담당’ 특사인 브렛 맥거크도 12월 22일 물러났다.
 
미국 내는 물론이고 동맹국들도 트럼프의 시리아 철군 결정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트럼프는 시리아 작전을 함께 펼쳐온 영국·프랑스 등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 동맹국과 논의를 거치지 않고 독단적으로 철군을 명령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감 의사를 밝히고 “동맹은 반드시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르 몽드가 보도했다. 이런 트럼프의 ‘동맹 무시’ 태도는 나토 동맹체제의 균열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트럼프는 2017년에 이어 2018년 나토 정상회담에서도 분담금 의무를 유독 강조하는 등 회원국들을 동맹국보다 ‘돈을 내는 나라’로 취급하면서 불만을 사왔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냉전 시대는 물론 1991년 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 군대를 파병하고 수많은 나라와 동맹관계를 유지하며 영향력을 강화해왔다. 그런 미국이 트럼프 시대에 들어와 ‘경찰국가 포기’를 선언하면서 글로벌 리더십 공백 상태에 빠지고 있다. 미국은 고립주의 정책을 선언한 것으로 보일 정도다.
 
하지만 그런 트럼프 대통령이 유독 남미의 석유 대국인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정권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외교적으로 정권을 압박하는 수준을 넘어 군사적 개입까지 거론하면서 정권 붕괴를 위해 달리고 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 군사 개입 가능성을 처음 내비친 것은 1월 28일 백악관에서 열린 베네수엘라 제재 발표 기자회견장에서였다. 미국의 안보 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 들고 있던 노란색 메모 패드에 ‘콜롬비아에 병력 5000명(5000 troops to Colombia)’이라고 적힌 내용이 기자들에게 포착됐다. 들킨 것이 아니라 일부러 보여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백악관 측은 군사 개입 가능성을 굳이 말로 발표하지 않고 이런 모양새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말보다 짐작이 훨씬 강한 인상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와 국경을 맞댄 콜롬비아는 ‘마약과의 전쟁’ 등에서 오랫동안 미국과 협력 관계를 유지한 친미 국가다. 군사적으로도 가깝다. 이에 따라 콜롬비아는 1999년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이후 반미연대를 주도한 베네수엘라와 껄끄러운 상황이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드론을 이용한 암살 기도 사건이 발생하자 콜롬비아 대통령이던 후안 마누엘 산토스 당시 콜롬비아 대통령을 사건 배후라고 주장하기도 했을 정도다.
 
베네수엘라는 반미연대 주도
먼로 미국 대통령은 1823년 의회 연설에서 미주 대륙을 유럽 열강의 영향권에서 배제하고 미국의 세력권으로 두겠다는 외교 정책을 천명했다.

먼로 미국 대통령은 1823년 의회 연설에서 미주 대륙을 유럽 열강의 영향권에서 배제하고 미국의 세력권으로 두겠다는 외교 정책을 천명했다.

미국은 베네수엘라에 대해 경제 제재도 강화하고 있다. 미국 재무부는 1월 28일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해 마두로 대통령 정권의 돈줄을 졸라맸다. 강력하고도 직접적인 경제 제재다. 세계 최대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베네수엘라는 석유가 주요 수입원이며, 차베스와 마두로 대통령은 석유산업을 국유화해 거기서 나오는 자금으로 무상 의료, 무상 교육, 생필품 염가 제공 등 포퓰리즘 정책을 펼쳐왔다. 국영석유회사의 미국내 자산을 동결하면 석유 수출대금 등 연 110억 달러 상당의 국가 수입이 봉쇄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가뜩이나 경제 사정이 어려운 베네수엘라의 목을 쥐는 제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석유 산업 국영화로 국영석유회사는 군부 출신이 낙하산으로 진출해 고위직을 독점하고 있다. 국영석유회사는 마두로 권력의 목줄을 쥐고 있는 군부에게 던져준 당근이나 다름없다. 미국의 경제 제재로 일자리와 이권을 잃게 된 군부가 마두로를 언제까지 지켜줄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이 미국의 인도적 구호물자 반입을 막기 위해 국경 도로를 봉쇄하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트럼프는 2월 18일 마이애미에서 연설하면서 “독재자 마두로가 원조물자의 입국을 막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마두로는 국민에게 원조물자를 제공하기보다 그들이 굶는 걸 보기를 원한다”고 맹비난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해 “시민의 자주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사회주의는 언제나 확장과 침해를 추구하고 타인을 예속시키려 둔다”고 비난했다. 내정 간섭으로도 비칠 수 있을 정도의 발언이다. 동맹국에는 ‘미국에 돈을 내라’고 강조해온 트럼프 대통령이 베네수엘라에 대해선 ‘(미국의 세금이 들어간) 원조물자를 받아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베네수엘라는 1999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세계 1위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석유 자원을 바탕으로 내부적으론 포퓰리즘 정책, 대외적으론 반미연대를 추구해왔다. 차베스는 석유산업을 국영화하고 석유로 얻은 오일달러로 교육·의료를 무상 제공하고 기초 식료품과 생필품을 거의 무상으로 공급했다. 그 결과 99년 50%이던 빈곤율을 2011년 27%으로 떨어뜨리고 빈민에게 깨끗한 상수도와 화장실을 보급하는 성과를 거뒀다. 국제 연대를 강화한다며 부자 나라인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의 빈민에게 난방을 지원하기도 했다. 차베스의 이런 행동은 ‘21세기 사회주의’의 모범사례로 평가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통령 3선을 금지한 헌법을 억지로 개정해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한 차베스가 암투병 끝에 2013년 사망한 후 베네수엘라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2014년 이후 국제유가가 떨어지면서 베네수엘라는 재원 부족에 시달렸다. 수요공급 법칙을 무시한 식품·생필품의 염가 제공은 시장 질서를 교란하고 암시장을 키웠으며 급기야 물자 부족 사태로 이어졌다. 고전적 사회주의 경제정책을 펼쳤던 옛 소련이 혹독하게 당했던 바로 그 물자 부족 사태다. 차베스의 뒤를 이은 마두로 대통령은 이를 통제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야당을 배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권력욕만 보였을 뿐이다.
 
그 결과 베네수엘라에선 심각한 생필품 부족 사태가 이어졌다. 굶주린 국민은 이웃 콜롬비아나 브라질로 넘어가 생필품을 구입하다 급기야 대규모 탈출 사태로 번졌다. 인플레는 극에 달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베네수엘라 인플레율을 1000만%로 예상할 정도다. 그런 가운데 정국은 더욱 혼미해지고 있다. 1월 23일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스스로 임시 대통령임을 선포하고,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이 이를 지지하면서 ‘한 나라 두 대통령’ 시대를 맞고 있다.
 
이런 베네수엘라를 두고 전 세계는 반으로 나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마두로 대통령을 지지하며, 미국과 유럽은 과이도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지지한다. 나토 동맹국이면서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독재를 펼치면서 미국과 사이가 나빠진 터키, 그리고 국민을 상대로 참혹한 내전을 벌이고 있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시리아가 마두로를 지지한다.
 
‘한 나라 두 대통령’ 대혼란
라틴아메리카에선 마두로와 가까운 좌파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볼리비아와 쿠바, 그리고 좌파 정권이 들어선 멕시코·우루과이가 마두로 정권을 지원한다. 나머지 국가는 과이도에 대한 지지를 보내거나 양자 사이 대화를 촉구하고 있다. 한마디로 베네수엘라를 둘러싸고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분열과 신냉전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세계의 경찰 역할을 포기하는 와중에도 이런 베네수엘라에 유독 집착하는 트럼프의 행동을 보면 1823년 12월 2일 당시 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외교방침인 ‘먼로주의’가 떠오른다. 먼로주의는 고립주의 외교정책으로 오인받기도 하지만 사실은 다르다. 먼로주의는 당시 유럽 열강에게 미주 대륙에서 손을 떼고 더 이상 간섭하지 말라고 압박하고 대신 미국이 미주 대륙 전체를 영향권에 두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분석된다.
 
먼로 대통령은 1823년 의회 연설에서 유럽 열강이 더 이상 미국 대륙을 식민지로 삼는 것에 반대하고, 미국과 멕시코를 비롯해 미주 대륙의 주권 국가에 대한 간섭 시도를 거부한다고 천명했다. 대신 미국은 유럽 열강 간의 전쟁에 대해선 간섭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할 것임을 밝혔다. 이 때문에 먼로주의는 미국의 고립주의로 오해받기도 했다. 다만 먼로 대통령은 유럽 열강 간의 전쟁이 미주 대륙에서 일어나면 이를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다고 강조했다. 미주 대륙은 미국의 안방이니 건드리지 말라는 선언이다. 미주 대륙을 유럽 열강의 영향권에서 배제하고 미국의 세력권으로 두겠다는 외교 정책인 셈이다. 고립주의와는 성격이 다르다.
 
중국은 거액 투자, 러시아는 폭격기 배치
오늘날 트럼프의 말과 행동은 이런 먼로주의와 상당히 닮았다. 중국은 원유를 깔고 있는 마두로 정권의 베네수엘라에 5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며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500억 달러는 베네수엘라가 중국에 진 부채 액수다. 러시아도 지난해 12월 10일 Tu-160 전략폭격기를 베네수엘라에 배치하고 미국의 코앞인 카리브해 정찰 작전까지 펼쳤다.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미국과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의 소련 사이에 벌어졌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연상케 하는 상황이다. 그해 10월 14일, 미국 첩보기 록히드 U-2가 쿠바에서 소련의 SS-4 중거리 탄도미사일(MRBM) 기지를 건설하는 장면과 해상으로 미사일을 운반하던 소련 선박의 사진을 찍으면서 미국과 소련은 14일 간 대립했다. 이 사건은 ‘세계가 핵전쟁에 가장 가까웠던 때’로 평가된다. 지금 러시아가 전략폭격기를 베네수엘라에 배치한 것은 그 정도로 심각한 사안은 아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가까운 남미 대륙에 소련과 중국이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은 미국으로선 그리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에 집착하는 한 이유다.
 
이에 따라 세계의 경찰 역할을 포기한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집착은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경고의 의미가 큰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트럼프는 ‘21세기형 먼로주의’를 선언하고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베네수엘라가 남미 최대의 석유 매장량을 가진 자원 대국이라는 점이다. 에너지 패권을 장악하려는 지구촌 강대국의 패권 경쟁의 시각에서 베네수엘라를 바라볼 수도 있다. 베네수엘라는 이래저래 글로벌 아킬레스건이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