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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남북 온도 차…안중근 유해 공동발굴로 해법 찾자

중앙선데이 2019.03.02 00:21 625호 10면 지면보기
[박정호의 사람풍경] 조소앙의 종손, 조범래 독립기념관 전시부장
조범래 독립기념관 전시부장이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重慶) 임시정부 요인들이 한국에 돌아오기 20일 전 청사 계단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조형물 앞에 서 있다. 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 백범 김구 선생 오른쪽 뒤로 조소앙 선생이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조범래 독립기념관 전시부장이 1945년 11월 3일 중국 충칭(重慶) 임시정부 요인들이 한국에 돌아오기 20일 전 청사 계단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조형물 앞에 서 있다. 사진 왼쪽에서 네 번째 백범 김구 선생 오른쪽 뒤로 조소앙 선생이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독립운동을 하셨다는데 왜 교과서에 이름이 안 나오지?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무릎에 앉아 할아버지의 행적을 수없이 들어온 그였다. 하지만 교과서 어디에도 할아버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중·고교 국사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김구·안창호는 나와도 조씨 성을 가진 할아버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는 독립운동 대신 ‘독립운동질’이라 했다. 그만큼 가족·친적들이 어렵게 살아왔다는 뜻이다.

조소앙 삼균주의
정치·경제·교육 균등 선구적 주창
반대 세력 포용 좌우통합도 모색

역사 연구 부실
독립운동사 연구 치즈덩어리 같아
겉으론 온전, 잘라 보면 구멍 숭숭

체계적 지원 필요
내년은 봉오동·청산리 전투 100년
피땀 흘린 독립운동 제대로 평가를

 
그 궁금증이 그를 키웠다. 손자는 대학에서 독립운동사를 공부하기로 했다. 아버지가 아들을 말렸다. “다시 생각해보면 안 되겠니.” 대학원에서 더 연구를 하겠다고 하자 아버지의 얼굴이 더 심각해졌다. 아들에게 같은 말을 1주일이나 했다. “정말 꼭 해야겠니.” 아들은 마음을 꺾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 기반인 한국독립당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천안 독립기념관 개관과 함께 연구원으로 들어가 33년째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독립기념관 지킴이쯤 된다.
 
 
독립기념관 개관 때부터 33년째 지킴이
 
그는 조범래(58) 독립기념관 전시부장이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1887~1958)의 종손자(從孫子)다. 친할아버지 조용한(1894~1935) 선생은 조소앙의 둘째 동생. 조소앙 선생 가문은 6형제, 여동생, 부인·자녀 등 모두 14명이 독립유공 포상을 받았다. 이회영(1867~1932)·안중근(1879~1910)·이상룡(1858~1932) 집안 등과 더불어 독립운동 명문가로 꼽힌다. 3·1운동 100년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을 찾아갔다.
 
올해를 맞는 마음이 각별하겠다.
“3·1운동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수립의 배경이 됐다. 하지만 3·1운동이 느닷없이 일어난 건 아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독립운동의 씨앗이 자랐다. 1910년대에 이미 임시정부가 선언한 민주공화제 움직임이 있었다. 3·1운동 직후 총 7개의 정부가 나타나기도 했다. 특정 집단, 세력이 아닌 우리 민중 전체가 역사의 주체였다.”
 
왜 굳이 독립운동사를 전공했나.
“어릴 적부터 알게 모르게 제 안에 쌓였을 것이다. 사실 역사 공부에도 기피재가 있다. 직계 조상을 연구한다는 건 아무리 객관적이라도 평가를 받기 어렵다. 무엇보다 자료가 많지 않아 애를 먹었다. 석사논문을 쓸 때만 해도 한국독립당 연구는 전무한 상태였다. 독립운동이 임시정부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지금도 그렇듯 정당활동이 뒷받침돼야 한다.”
 
요즘 조소앙이 주목받고 있다. 1941년 작성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이 올 초 문화재로 등록됐다. 현재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전시 중이다.
“충칭(重慶) 임시정부 시절 해방 후 국가건설의 방향을 구체화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 이른바 3균주의를 주창했다. 남녀평등 사상도 들어 있다. 1948년 제헌헌법의 기초가 됐다. 경제 균등의 핵심은 토지·대생산기관의 국유화다. 지금 시점에서도 급진적이다. 그러니 70~80년대에 감히 연구를 할 수 있었겠나. 아버지가 공부를 말린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조소앙은 남북 모두에서 인정받는 독립운동가다. 그런 경우가 흔하지 않다.
“한국독립당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통합이다. 임시정부가 숱한 난관을 거치면서도 충칭에서 한 일이 좌우통합이다. 반대 세력을 포용하면서 말 그대로 온전한 독립국가를 이루려 했다. 그 기본이념이 삼균주의다. 독립운동가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독립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남북으로 갈라진 현 상황은 절대 아닐 것이다.”
 
말처럼 쉽게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임시정부는 1944년 4월 어렵게 통합정부를 구성했다. 당시 임시헌장(헌법)에서 자유·평등·진보를 기본정신으로 선언했다. 그때 임시의정원 기록을 보면 진짜 격렬하게 싸웠다. 타협과 협상을 해가며 독립이란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우리는 일제에 앗긴 주권을 되찾는 1차 독립을 이뤘다. 그러나 남북 분단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다. 평소 외부 강연에서도 우리 모두 제2의 독립군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3·1운동을 보는 남북의 인식부터 큰 차이가 난다. 현실을 직시하자.
“잘 알고 있다. 온도차가 크다. 북한에선 민족 전체 대신 노동자·농민을 앞세운다. 3·1절 남북공동행사도 무산됐다. 통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언젠가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안중근·신채호에서 실마리를 찾았으면 한다. 그나마 남북 사이에 큰 이견이 없는 인물이다. 안중근 유해 공동발굴이 모범이 될 수 있다. 중국을 설득해야 하지만 남북 관계개선에 실질적 효과를 볼 수 있다.”
 
독립기념관에선 무엇을 해왔나.
“중국 내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 조사, 복원 실무를 담당했다. 임시정부 유적지를 주로 조사했다. 멕시코·쿠바·일본·유럽에 흩어진 사적지 보고서도 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광복 50년을 맞은 1995년 충칭 임시정부 연화지 청사 복원공사다. 당시 충칭시 정부와 의견 충돌이 극심했다. 92년 한·중 수교 직후 공사를 시작했는데 중국 측은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단체 정도로 이해했다. 우리는 유적 설명문에 ‘독립’이란 문구를 넣으려 했으나 그들은 항일을 내세웠다. 중국 내 소수민족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결국 독립을 관철시켰다. 또 우리는 ‘공동투쟁’을 주장했는데 중국은 북한을 의식한 탓인지 ‘한중우의’를 고집했다.”
 
조소앙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임시정부 청사 2층에 외교부장의 방이 있다. 그 해 8월 15일 복원 기념식을 앞두고 그곳에 올라가 제사를 올리듯 큰절을 했다. ‘할아버지 저 왔습니다. 덕분에 오늘 복원식을 거행하게 돼 감사 드려요’라고 했다. 그날 따라 사무실도 포근했다. 89년 친할아버지 재판기록을 부산 정부기록보관소에서 찾아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을 한 것도 잊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 정말 좋아하셨다. 처음으로 효도를 했다. 내가 죽어서도 할아버지 얼굴을 뵐 수 있을 것 같았다.”
 
 
“죽어서도 할아버지 얼굴 볼 수 있을 것”
 
독립운동사 연구 상황은 어떤가.
“관련 연구가 활성화한 것 80년대 중반부터다. 일본의 역사교사서 왜곡이 불거지면서 관심이 커졌다. 독립기념관도 그런 분위기에서 건립됐다. 하지만 반짝 특수에 그쳤다. 2000년대 이후 시들해졌다. 연구자·학자들이 설 자리도 줄어들었다. 한창 때를 100으로 치면 지금은 50도 안 되는 것 같다. 독립운동사 연구는 치즈덩어리 같다. 겉으로는 온전해 보이지만 막상 잘라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의병·임시정부·무장투쟁 등 파고들어야 할 게 수두룩하다.”
 
3·1운동 100년이 무색해진다.
“4월 임시정부 100년이 지나면 열기도 사그라들 것이다. 대중을 탓할 수는 없다. 체계적·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내년이면 광복군 창설 80년, 봉오동·청산리전투 100년이다. 역사는 흐름이다. 항상 새로운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역사에도 정의가 있다는 점이다. 가족·친지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피땀을 흘린 독립운동가들을 제대로 평가했으면 한다.”
 
새로 문 연 3·1운동관, 대한독립선언서 등 원본 전시
선언서(左), 태극기를 찍어낸 목판 원본(右)

선언서(左), 태극기를 찍어낸 목판 원본(右)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조선민족대표들이 발표한 독립선언서의 첫 부분이다.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찍어 흔히 보성사판으로 불린다. 하지만 작은 실수가 있었다. ‘조선’의 앞뒤가 바뀌어 ‘선조’로 인쇄됐다. 오타를 확인했지만 선언서는 이미 배포된 상황. 나중에 이를 바로잡았지만 독립기념관에 있는 선언서(사진 왼쪽)에는 ‘조선’ 대신 ‘선조’가 또렷하다.
 
독립기념관 3·1운동관(제3관)이 새로 문을 열었다. 3월 한 달 동안 3·1운동 관련 문서가 원본 그대로 전시된다. 다음달부터는 유물 보호 차원에서 복제본이 나온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한인 유학생들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 1919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한 ‘대한독립선언서’ 등이 있다. 특히 ‘대한독립선언서’에는 임시정부 임시헌장, 각료 명단 등이 실려 있어 임시정부가 3·1 정신을 잇는 정부임을 알 수 있다.
 
당시 태극기를 찍어낸 목판 원본(사진 오른쪽), 1919년 4월 4일 충남 당진(옛 서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한 남상락씨가 손수 바느질로 만든 태극기 등도 볼 수 있다. 남녀노소 시민 100명의 만세 소리를 들려주고, 서세옥 화백의 ‘3·1 만세도’를 동영상으로 재연하는 등 시청각 자료도 크게 늘렸다. 조범래 부장은 “1910년대 구국운동부터 1920년대 광주학생운동·원산총파업까지 나라독립을 위한 우리 민족의 활동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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