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K·S 콤비의 헌신…연 1000억 거두는 전지훈련 낙원 일궜다

중앙선데이 2019.03.02 00:20 625호 25면 지면보기
[정영재의 스포츠 오디세이] 20년 전 서귀포 겨울을 깨운 두 남자
서귀포시 법환동에 자리 잡은 제주월드컵 경기장. 2002 월드컵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장’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 경기장 건립을 계기로 서귀포 전지훈련 시대가 열렸다. [사진=서귀포시청]

서귀포시 법환동에 자리 잡은 제주월드컵 경기장. 2002 월드컵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장’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이 경기장 건립을 계기로 서귀포 전지훈련 시대가 열렸다. [사진=서귀포시청]

대한민국에서 가장 따뜻한 도시는 제주 서귀포다. 겨울이 가장 뜨거운 도시도 서귀포다. 겨울철(12∼2월) 최저기온이 영상 5℃ 아래로 잘 내려가지 않는 서귀포는 제주시만큼 바람이 강하지도 않다. 전국에서 축구를 포함한 야구·농구·육상 등 각종 스포츠 팀들이 전지훈련을 내려온다. 올해 1월에도 15개 종목 260여 개 팀 1만여 선수들이 서귀포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중국 프로축구팀들도 서귀포를 찾았다.

강상주 전 서귀포시장
JP 설득해 2002월드컵 경기장 건설
국비 4500억 받아 도로 등 정비
인구 10만 어업도시 세계에 알려

설동식 전 서귀포고 감독
최순호·변병주 등 축구 인맥 총동원
자비 접대하며 중고교 감독 등 설득
선수만 연 3만 명 몰리는 시장 개척

 
이들이 서귀포에 뿌리고 가는 돈은 얼마나 될까. 지난해 제주발전연구원은 “스포노믹스(SponomicS·스포츠와 이코노믹스의 합성어)를 통해 서귀포가 누리는 경제 효과가 연간 550억원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전지훈련(3만 명)으로 330억원, 각종 대회(20개)로 220억원의 효과가 발생한다고 봤다. 하지만 이는 선수단 숙식비만 계산한 것이다. 선수 한 명에 학부모·친지 등 2명 정도는 따라온다. 렌터카·관광·골프·선물·식사·술자리 비용을 합치면 연간 1000억원은 쉽게 넘어간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장’ 건설
 
강상주 전 시장

강상주 전 시장

서귀포에서 전지훈련이 시작된 게 1999년이니 올해로 20년을 맞았다. 조용하고 쓸쓸하기까지 하던 서귀포의 겨울에 1조원 이상의 선물을 안긴 사람들은 누구일까.  
 
제주월드컵경기장 근처에서 감귤 농사를 짓고 있는 강상주(65) 전 서귀포시장을 만났다. 서귀포 인구 10만이 안 되던 98년 시장이 되자마자 그는 2002 한·일 월드컵 개최도시 신청을 했다. 한라산이 북서풍을  막아주고, 겨울에도 파릇파릇한 잔디에서 운동할 수 있는 서귀포의 장점을 살리고자 했다. 월드컵경기장 신축을 지렛대 삼아 교통·상하수도·공원 등 도시 인프라를 혁신하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제주시는 다행히도(?) 월드컵 개최지 신청을 하지 않았다.
 
“당시 경기장 건설비가 1500억원으로 나왔는데 서귀포시 경상회계는 1100억원뿐이었어요. 그래도 자신 있었죠. 중문 해안의 롯데·신라 같은 호텔은 입구는 1층이지만 바다 쪽에서 보면 5층, 7층이 되거든요. 그만큼 경사가 급하니까 북쪽을 깎으면 폴대나 H빔 같은 시설물 없이도 경기장을 지을 수 있어요. 그래서 건설비를 900억원으로 맞췄지요.”
 
서귀포시 법환동에 돛단배 모양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장’이 들어설 밑그림이 마련됐다. 문제는 도로망을 비롯한 인프라 확충이었다. 강 전 시장은 “나랏돈을 따오는 수밖에 없었죠. 자세히 알아보니 서울시의 88올림픽대로 건설비용을 ‘88올림픽 지원법’에 따라 국가가 댔다는 기록이 있었어요. 이 특별법을 똑같이 준용한 게 2002월드컵 지원법이었거든요. ‘이거다’ 싶어 무릎을 탁 쳤죠. 전윤철 당시 기획예산처장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국비 4500억원을 지원 받았습니다.”
 
큰 고비도 있었다. 당시 DJP연합 실세였던 김종필(JP) 총리가 “월드컵 여는 데 10개 도시에 다 경기장을 짓는 건 낭비다. 서귀포를 포함해 몇 개는 빼라”고 말한 것이다. 폭탄을 맞은 강 시장은 온갖 인맥을 동원해 JP 면담을 요청했다. 잠깐 인사할 시간만 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JP를 만난 강 시장의 첫 마디는 이랬다. “총리님. 저희 제주도 사람들은 총리님을 제주도의 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 감귤을 보급시켜 주셔서 이것 때문에 삽니다.” 기분이 좋아진 JP가 “그래? 앉아 봐”라며 시간을 줬다.
 
“저희가 21세기 대비해서 스포츠산업으로 가려고 하는데, 총리께서 만들어주신 감귤밭에 월드컵 경기장을 지으려고 합니다.”
 
“그래? 내가 원래는 서귀포 축구장을 반대했는데, 시장이 이렇게 열심이니 도와줘야지.”
 
“아이고 총리각하. 감사합니다.” 강 시장은 JP를 향해 넙죽 큰절을 했다.
 
설동식 전 감독

설동식 전 감독

2002 월드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한국 대표팀이 서귀포에서 전지훈련을 했다. 독일을 포함해 7개 팀이 서귀포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강 시장은 “서귀포를 전지훈련 메카로 만들 기회”라며 설동식(59) 당시 서귀포고 축구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항 픽업, 생수·감귤 제공 등 진심 서비스
 
서귀포에 전지훈련 온 축구 선수들이 연습 경기를 하고 있다. [사진=서귀포시청]

서귀포에 전지훈련 온 축구 선수들이 연습 경기를 하고 있다. [사진=서귀포시청]

설 감독은 제주 사람이 아니다. 충북 청주 출신으로 숭실고-단국대에서 공격수로 활약했지만 부상으로 일찍 은퇴했다. 사업으로 꽤 돈을 벌었고, 우연한 기회에 서귀포에 왔다가 서귀포고를 맡게 됐다. 그는 절친인 최순호(포항 스틸러스 감독)·변병주(전 대구FC 감독), 후배 조민국(전 울산 현대 감독) 등에게 “서귀포가 전지훈련 최적지”라고 소개했다. 알음알음으로 몇 팀이 내려오자 강 시장이 설 감독에게 “전지훈련에 대해선 전권을 드릴 테니 서귀포를 한번 살려 봅시다”고 했고, 자리가 나는 곳마다 축구장을 지었다.
 
설 감독은 내려온 팀들의 훈련장 배정과 연습경기 일정을 꼼꼼히 체크했다. 숙소·식당 등과 관련해 문제가 생기면 직접 나서 중재하고 해결했고, 자비로 중·고교 감독들에게 밥과 술을 사며 ‘서귀포 전도사’ 역할을 자처했다. 서귀포시는 전지훈련 온 팀의 숙박·렌트비를 파격적으로 할인해줬고, 공항 픽업, 훈련장 생수·감귤 제공 등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서귀포는 전지훈련 메카로 입지를 굳혔다.
 
설 감독은 수도권 중학교의 ‘B급 자원’을 스카우트해 서귀포고에서 정성껏 키웠다. 국가대표 출신 골키퍼 정성룡, 공격수 김동찬 등이다. 서귀포 출신인 이종민은 ‘서귀포 쌕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설 감독은 “중학생 스카우트, 고교생 대학 진학 등을 위해 제주∼김포 비행기를 탄 것만 공식 기록으로 1500회가 넘어요”라며 “형편이 어려웠던 종민이가 수원 삼성과 계약금 3억2000만원에 사인한 뒤 종민이 어머니가 비행기 착륙 때까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 걸 잊을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
 
 
선수·학부모 체험 프로그램도 필요
 
전지훈련 20년을 맞아 서귀포는 새로운 변신을 요구받고 있다. 온난화 영향으로 남해안뿐만 아니라 동해안 도시에서도 전지훈련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서귀포시는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스포노믹스 육성사업’에 선정돼 받은 돈으로 월드컵경기장 내 트레이닝센터를 확 뜯어고쳤다. 국가대표 선수촌 못지 않은 시설을 자랑한다. 같은 층에 있는 재활 클리닉은 훈련 중 다친 선수들로 북적댄다.  
 
대한선수트레이너협회 송기재 사무차장은 “지금은 축구 선수가 80%인데 야구 쪽 수요를 흡수하면 좋겠다. 프로야구 비활동 기간(단체훈련이 금지된 시기)에 형편이 어려운 선수들이 개인훈련을 할 수 있도록 프로야구선수협의회와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취재 중 만난 신문선 명지대 교수는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여기 와서 축구만 생각하고 훈련만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한라산 트래킹, 이중섭미술관 견학 같은 다양한 활동으로 인성과 정서 함양에 도움을 줘야 한다. 학부모들도 아이들 훈련 구경만 할 게 아니라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귀포는 전지훈련 종목 확장, 인프라 확충, 다양한 체험·견학 프로그램 개발 등의 과제를 안고 있다. 중국·동남아 등으로 ‘아시아 전지훈련 메카’ 서귀포를 확장할 기회도 잡았다. 더 중요한 건 강상주·설동식 같은 ‘창업자’들의 순수함과 열정을 잊지 않는 것이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구독신청

공유하기
Innovation Lab
Branded Content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