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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유전불행’에 빠지지 않으려면

중앙일보 2019.03.01 09:00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28)
은퇴 후에 할 일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어떠한 계기와 취미가 할 일로 발전할 수 있다. 사진은 최영근 화가와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사진 백만기]

은퇴 후에 할 일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어떠한 계기와 취미가 할 일로 발전할 수 있다. 사진은 최영근 화가와 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사진 백만기]

 
은퇴하면 무얼 하지? 퇴직을 앞둔 직장인의 고민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돈만 준비하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돈도 필요하다. 그러나 돈이 전부는 아니다. 돈이 있어도 할 일이 없다면 유전불행(有錢不幸)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은퇴 후에 할 일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것저것 생각해보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다. 관심만 가지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비서실에 근무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사장이 부르더니 고객에게 선물할 것이라며 그림 한 점을 사오라고 지시했다. 직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화랑이 하나 있었다. 그곳에서 그림을 구경하다가 화랑주인이 권하는 풍경화를 사다 드렸다. 사장은 내가 사 온 그림을 살펴보며 이것저것 묻는데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은퇴 후 취미 된 미술관 관람
사회생활을 하려면 그림도 알아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동네에 누드화가로 유명한 김호걸 화백이 살고 있었다. 주말에 그를 찾아가 그림을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으니까 우선 많이 보라고 한다. 그다음에 좋아하는 화가가 생기면 그의 그림을 꾸준히 지켜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후부터 틈틈이 전시회를 찾아다녔다. 처음에는 선생이 해준 말의 의미를 잘 몰랐다. 그러나 그림을 자주 보다 보니 신기하게 그림 보는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전시장을 찾았을 때 잘 이해되지 않는 작품은 화가에게 직접 물었다. 자신의 그림에 관심을 기울이는 객을 만나는 것보다 화가를 기쁘게 하는 게 어디 있겠는가. 화가는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도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렇게 인사를 나눈 화가들이 그다음부터 전시회의 프로그램을 보내주며 나와 인연을 맺었다.
 
그림을 사 오도록 시킨 사장의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림을 눈에 많이 담으며 그림 보는 눈을 키웠고, 이론적 공부를 뒷받침했다. 미술 모임을 만들어 그림부터 사진, 건축까지 관심 분야를 넓혔다. [사진 백만기]

그림을 사 오도록 시킨 사장의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그림을 눈에 많이 담으며 그림 보는 눈을 키웠고, 이론적 공부를 뒷받침했다. 미술 모임을 만들어 그림부터 사진, 건축까지 관심 분야를 넓혔다. [사진 백만기]

 
그림을 보는 눈이 뜨이자 미술이론과 미술사 공부를 시작했다. 미술 관련 책도 많이 보았다. 미술동호인들과 스터디 클럽을 만들어 작가 연구도 했다. 큐레이터 공부도 했다. 그림뿐만 아니고 사진, 건축으로 지평을 넓혀갔다.
 
그림 공부한 것을 계기로 은퇴 후엔 분당에 갤러리 카페를 오픈했다. 판화가 이철수 등 여러 화가의 전시를 개최했다. 무엇보다 잊지 못하는 건 이웃 동네에 사는 아마추어 주부 화가의 수채화 전시회였다. 어느 날 손님이 전시 중인 수채화를 사 갔다. 난생처음 그림을 팔고 무척 좋아하던 아마추어 화가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민들을 위해 가끔 미술관에서 전시회 도슨트 봉사도 했다.
 
요즘도 그림을 자주 보러 다닌다. 지금까지 다닌 전시회의 숫자가 어림잡아 1000번은 넘을 것이다. 미술관이나 화랑에 가서 그림 구경하는 것은 돈도 별로 들지 않아 은퇴 후의 취미로 제격이다.
 
그림을 오래 지켜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정서에도 좋다. 내게 이런 취미를 갖게 해준 사장이 고맙다. 그때 그림을 사 오라는 지시가 없었다면 이런 즐거움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이런 기회가 있을 때 무심코 넘기지 말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권한다.
 
은퇴 후 미술과 관련한 활동을 시작했다. 시민들을 위해 미술관에서 도슨트 봉사를 시작했고(왼쪽 상단), 갤러리 카페(왼쪽 하단)을 오픈했다. 갤러리 카페에서 이철수 판화전(오른쪽)을 개최하기도 했다. [사진 백만기]

은퇴 후 미술과 관련한 활동을 시작했다. 시민들을 위해 미술관에서 도슨트 봉사를 시작했고(왼쪽 상단), 갤러리 카페(왼쪽 하단)을 오픈했다. 갤러리 카페에서 이철수 판화전(오른쪽)을 개최하기도 했다. [사진 백만기]

 
은퇴 후에도 그런 기회는 여전히 존재한다. 지난해 중앙일보 기자가 내게 죽음을 주제로 10회 정도의 글을 부탁했다. 처음에는 누가 죽음에 대한 글을 읽으랴 싶어 완곡히 거절했으나 기자의 거듭된 부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6회 정도 연재하고자 하였으나 독자의 반응이 좋다는 기자의 격려로 20회 가까이 썼다.
 
‘이거다’하는 것을 전문가 수준으로 파야
글을 쓰면서 어떤 사명감도 느꼈다. 사실 우리나라 죽음의 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하위에 있다. 지난해 연명 의료결정법이 시행되었지만,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글을 연재하며 죽음에 대한 책 수십 권을 또 읽었다. 지금까지 읽은 책이 100여권이 된다. 신문에 연재했던 것을 계기로 앞으로 죽음에 대한 연구를 계속할 예정이다. 남은 생에서 우리 사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은 것 같다. 아마 신이 기자를 통해 내게 이런 미션을 주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한다.
 
직장에 다니며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가 망설일 때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관심 기울여 보기를 권한다. 이것저것 섭렵을 하다가 “이거다” 하는 것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그때 그것을 전문가 수준으로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바로 ‘T자형(다양성 속에 전문성을 겸비한 인재상)’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러면 퇴직 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게 인생 2막에서 자신이 할 일이 되기 때문이다.
 
백만기 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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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기 백만기 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 필진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 누구나 한번은 겪게 되는 죽음. 죽어가는 사람의 소원은 무엇일까. 의외로 돈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 오르거나 하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다. 생을 살며 ‘조금만 더’ 하며 미뤘던 작은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은퇴 후 인생 2막에서 여가, 봉사 등 의미 있는 삶을 산 사람이 죽음도 편하다고 한다. 노후준비엔 죽음에 대비하는 과정도 포함해야 하는 이유다. 은퇴전문가가 죽음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방법과 알찬 은퇴 삶을 사는 노하우를 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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