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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밤잠 설치게 한 그녀 "난 결혼 자격 없어"

중앙일보 2019.03.01 08:00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23화

 
“천~~ 나야, 무명씨. 이게 내 핸드폰이야. 많이 늦었지?”
퇴원 전날 오전 이런 문자를 받았다. 마침내 누나가 핸드폰을 공개한 것이다. 만난 지 11개월쯤 돼서다.
 
“정말 누나 맞아요? 그동안 소통은 이메일뿐이었는데 이젠 실시간 통신이 가능한 최첨단 시대로 접어든 거네요.”
“내가 좀 보수적이잖아. 아니, 시간을 아껴 쓰는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 ㅎㅎ 다른 뜻은 없었어. 이메일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솔직히 충분하진 않았죠. 최소한의 소통이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거예요.”
“그랬구나. 그나저나 언제 퇴원해?”
“내일요.”
“마침 내일 아무 일 없는데 내가 갈까?”
 
난처했다. 장 팀장이 오후에 반차 내고 병원으로 오기로 이미 약속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런 상황은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누나와 장 팀장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심플하게 판단하기로 했다. 앞선 약속을 기준으로.
 
“누나, 고마워요. 그런데 저희 팀 막내 직원이 내일 오후 도와주기로 했어요. 그동안 사우디아라비아 출장으로 한 번도 병원에 못 왔다며 퇴원이라도 도와주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어요.”
“아, 그렇구나. 그러면 퇴원 잘하고 조만간 연락해.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ㅎㅎ”
 
장 팀장은 예정대로 다음 날 병원으로 왔다.
“오늘까지 이런 수고 끼쳐 어떡하지? 영 부담되네.”
“부담은 무슨…. 그리고 이번 일에 나도 이만큼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닌감? 호호.”
 
책임진다고? 그 말이 참 묘하게 다가왔다. 언제 어디서나 쾌활한 장 팀장이라 평소 화법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 귀엔 그 이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부른 모범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엄마가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 제가 장서희입니다
“어이구, 우리 아들. 고생 많았지?”
“별거 아닌 사고로 의외로 고생했어요. 참, 엄마, 전에 말씀드린 적 있죠. 이 회사로 와서 대학 동창 만났다고요. 그 장 팀장이 퇴원까지 이렇게 수고해 주네요.”
“안녕하세요? 장서희입니다. 그동안 걱정 많이 하셨죠?”
“이렇게 신세 져서 어떡하나……. 너무 고마워요.”
“신세는 무슨 신세요? 그런 말씀 마세요.”
“우리 회사 기획팀장인데 일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 인기 짱이에요.”
 
장 팀장이 돌아간 뒤 엄마와 둘이 오랜만에 겸상했다.
“이제 다 나은 거지?”
“당분간만 좀 조심하면 된대요. 더 이상 문제는 없을 거예요.”
“아까 그 친구, 장 팀장이라고? 당연히 결혼은 했겠지?”
“그럼요, 이 나이까지 시집 못 갈 친구는 결코 아니죠. 하하.”
예상질문을 준비해 놓진않았지만 대답은 바로 튀어나왔다. 왜 그렇게 답한 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밥을 먹은 뒤 나는 누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직원이 도와줘서 퇴원 잘했고, 오랜만에 엄마가 차려준 밥 맛있게 먹었어요.”
답변은 1시간쯤 뒤에 왔다.
“아, 다행……. 몸조리잘하고, 또 연락 줘. 나 지금 누구랑 미팅 중이라….”
문자를 나눈 지 이제 이틀인데, 오래된 습관처럼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로부터 1주일 뒤 나는 누나와 마주 앉았다. 누나가 맛있는 거 사 주겠다며 정한 퓨전 한식집이었다.
“핸드폰 넘 고마워요.”
“사실 너무 늦었지….”
“그런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어서 그랬어요? 하하.”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물었다.
“천이가 그랬잖아. 큰 사고를 당했지만 바로 연락도 할 수 없었다고. 그리고 내가 전에 그랬지. 핸드폰은 위급상황에나 쓰는 거라고. 아버지 문제로 요양원 간호사들과 소통할 때처럼 말이야.”
“아버지 위급상황과 이번 내 교통사고가 같은 급이라는 말씀?”
 
누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로 입원했다는 내 메일을 받기 전날 누나는 오랜만에 요양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그동안 내가 몇 번 다녀갔다는 얘길 들었다고 했다. 나는 뜨끔했다. 얘기한다고 하면서 까먹고 있다가 실수한 거 같았다. 그런데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누나의 말투는 매우 유순했다.
 
“내가 오늘 저녁 사는 건 천이가 병원 신세 지느라 몸 축난 거 보충해 주는 뜻도 있지만 아버지 신경 써 준 게 너무 고맙기 때문이야.”
자신도 자주 찾지 못하는데 내가 세 번이나 인사 간 것이 무척 고맙다는 것이었다. 내 메일을 받고 바로 다음 날 병원으로 달려간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난 결혼할 자격이 없어
“누나에게 미리 알리지 않고 요양원을 방문해 오히려 혼날 줄 알았어요.”
“그래? 그게 왜 혼날 일이야? 당연히 고마워할 일이지. 내가 아버지를 한때 정말 싫어하고, 그래서 가출도 했지만 언제 돌아가실지 모를 지금은 연민의 정이 훨씬 커. 사랑은 여러 가지 감정으로 표출되지만 불쌍하다고 여기는 마음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해.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아버지를 그런 눈으로 바라본다는 게 내 마음을 흔들었어. 알다시피 아버지는 지금 내 유일한 가족이잖아.”
 
누나의 눈에는 이슬이 맺혔다. 내 앞에서 보이는 두 번째 눈물이었다. 나는 바로 손수건을 꺼내 닦아줬다.
“아버지는 천이가 아주 마음에 드시는가 봐. 얼마나 좋게 말씀하시던지…. 나 몰래 와서 아버지를 완전히 자기편으로 만들었나 봐. ㅎㅎ”
“그래요?”
“요양원을 나서려는데 뭐라 하시는지 알아? 내 죽기 전에 그 친구랑 결혼하면 좋겠다는 거야.”
“그래서 뭐라 했어요?”
“내가 자격이 안 된다고 했어. 결혼할 자격….”
 
그건 마치 나랑 결혼하고 싶은데 자격이 안 돼 걱정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결혼도 한 번, 이혼도 한번 해 봤으니 더 이상의 결혼은 없다고 분명하게 선을 긋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결혼할 자격이 뭔데요?”
“다 알면서 왜 그래?”
그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엄마에게 장 팀장은 예전에 이미 결혼했다고 둘러댄 건 일단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은 영 찜찜했다.
 
‘자격은 내가 정하는 거예요. 내가 문제없다면 누나는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이렇게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나가 말한 자격 없음은 아이를 낳기 어려운 나이를 에둘러 말한 것이리라. 그걸 안다면 면전에서 “그건 아무 문제 안 된다”고 전에 한 말을 재차 강조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6개월 이상의 공백이 가져온 변화였을까. 게다가 그새 장서희란 인물도 새로 등장했으니.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누나와 장서희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키워드를 뭐로 넣느냐에 따라 선택은 계속 갈렸다. 그 와중에 누나가 말한 ‘자격’은 점점 더 부각되고 있었다. 전에는 애 없이 살 수도 있고, 입양하는 방법도 있을 거라고 했는데, 이 시점에선 그게 과연 내 진심인지 알 수 없었다.
 
문자도 없이 자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도 아닌 것 같았다. 뭐라 쓸까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핸드폰 번호를 아는 게 부담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누나, 오늘 여러 가지 얘기, 넘 고마웠어요. 아버지가 날 그렇게 이쁘게 보고 계신다는 말씀도…. 난 참 복이 많은가 봐요. 굿나잇~~”
 
써놓고 보니, 이 정도면 오늘 그 애매한 상황을 무난하게 커버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글공부 하나는 잘했구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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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심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