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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의 시선] 분노가 부른 자유한국당의 우경화

중앙일보 2019.03.01 00:41 종합 28면 지면보기
이정민 논설위원

이정민 논설위원

자유한국당의 2·27 전당대회를 보면서 4년 전 새정치민주연합(더불어민주당 전신)의 2·8 전당대회를 떠올렸다. 문재인 대표 체제를 탄생시킨 전당대회다. 놀랍게도 당시 제1야당이던 새정치연합과 지금의 한국당은 너무 빼닮았다. 새정치연합은 원내 의석을 130석이나 갖고 있었지만 국민 지지는 바닥이었다. 세월호 참사를 목도한 국민들의 분노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는 가운데 치러진 재·보선에서도 패배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우경화 논란 휩싸이게 된 데는 황교안 대표 책임도 커
황 대표, 보수 세력의 분노 관리하는 조련사 돼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이어 대통령 선거·지방선거에서 연달아 참패하고도 좀처럼 반등의 모멘텀을 못 찾고 있는 한국당과 흡사하다. 한국당은 ‘100년 집권’을 들먹이는 적장(敵將)에게서 공개적으로 “전당대회에서 말하는 내용이나 행위를 보면 한국당에 대한민국의 장래를 맡길 수 없다”는 모욕을 듣는 한심한 처지가 됐다.
 
민생과 국익은 외면한 채 계파와 파벌 싸움에 전전긍긍하다 가혹한 회초리를 받았다는 점까지도 똑같다. 10년 넘게 친박-친이, 친박-비박으로 갈려 파벌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국당과 마찬가지로, 새정치연합은 친노(친노무현)-비노계의 피 터지는 계파 싸움으로 곪을 대로 곪아 있었다.  
 
“도저히 질 수 없는 선거를 졌다”는 자조와 위기감이 팽배했을 때 지휘봉을 쥐며 등장한 게 문재인 대표다. 문 대표는 “분열을 버리고 변화하고 단합하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친노의 수장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친노 패권주의란 비난을 샀다. 김한길·안철수 전 대표 등 참다못한 비노계가 결국 보따리를 사면서 불편한 동거는 일단락됐지만 친문재인계엔 좌파 모험주의, 원리주의라는 굴레가 씌워졌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문재인 정부에 대한 보수 진영의 분노는 황교안 대표 체제를 만들어냈다. 탄핵 총리, 공안 검사라는 ‘주홍 글씨’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지지(50.3%)를 받았다. 박근혜 정부 내내 법무장관→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을 지낸 황 대표가 운 좋게도 정치 입문 43일 만에 제1야당의 당권까지 접수하게 된 것이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대신 한국당엔 우경화란 그늘과 굴레가 씌워졌다. 특히 경선 과정에서 황 대표가 “(박 전 대통령이) 돈 한 푼 받은 거 입증이 안 됐다”거나 “헌법재판소 탄핵 결정이 이뤄지기 전에 동시에 법원에서 형사 사법절차가 진행됐다”며 탄핵에 불복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게 불쏘시개가 됐다. 나중에 거둬들이긴 했지만 태블릿 PC에 조작가능성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격하게 밀려드는 분노 앞에 ‘탄핵을 인정하고 박근혜를 극복하자’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그가 일반 국민 여론조사에서 1위(50.2%)를 하고도 2위로 밀려난 이유다. 좌파 성향의 문재인 정부에 대한 보수 진영의 분노지수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과거 회귀 이미지와 극우 정당이란 굴레는 내년 총선을 앞둔 한국당은 물론 차기 대선을 노리는 황 대표 본인에게도 딜레마다. 탄핵에 대한 입장차는 당장 보수 대통합에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경선 과정에서부터 보수 통합을 강조해온 황 대표가 풀어야 할 과제다.
 
극단은 또 다른 극단을 부른다. 역사학자 임지현은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을 이용해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현상을 ‘적대적 공범관계’나 다름없다고 역설한다. (『적대적 공범자들』) 예컨대 9·11테러 때 부시 대통령과 오사마 빈 라덴이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을 극대화해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는 데 이용했으며, 결국 승자는 국민이 아니라 미국의 국가 권력과 탈레반 민족주의라고 주장한다.  
 
우리 정치사에도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진보정부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이용해 우경화된 보수야당이 팽팽히 맞서는 살얼음판 정국이 펼쳐진다면 과연 누가 승자가 될까.
 
황교안 대표 앞에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선명성을 앞세운 보수 정당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혁신과 통합을 통한 보수 대통합의 넓은 길이다. 전자는 집토끼를 공고히 하는 것이고 후자는 산토끼를 공략하는 것이다.
 
한국당은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집토끼 단속엔 어느 정도 성공했다. 정권을 향한 집토끼들의 분노는 지금 한국당을 움직이는 동력이다. 하지만 일단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면 무사히 내려올 방법이란 없다. 분노를 관리해야 할 책임이 황 대표에게 있다는 말이다. 피타고라스는 “분노는 무분별하게 시작되어 후회로 끝을 맺는다”는 말을 남겼다. 황 대표가 노련한 조련사가 돼야 하는 이유다. 
 
이정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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