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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 지는 바닷가서 만난 여인이 오래 기억되는 까닭

중앙일보 2019.02.28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29)
예술의 전당 음악분수. [중앙포토]

예술의 전당 음악분수. [중앙포토]

 
음악 분수
 
모였다 흩어지는
사거리 가운데 뾰족한 섬
굴렁쇠는 돌아도 중심은 숨 쉬고 있다
 
꼬리 물고 숨 가쁘게 도는 욕망의 열기를
차별 없이 섞어 들이마시고는
시원한 노랫가락으로 세상에 수혈한다
 
장난삼아 던지는 호기심 몇 닢에도
오방색 사랑의 비밀을 토하며
조각보 마음들을 하늘에 뿜어
썩지 않는 보물로 간직한다
 
물이 물인 줄 아는 개구쟁이들
죽비처럼 쏟아지는 소낙비 맞으며 도약한다
얼씨구 살리고 절씨구 죽이는
겸허한 자연의 유머
 
일방통행로 얽힌 도시의 풍경 속에서
베어 문 사과처럼 몸과 마음을 움직이면
한여름이 아니더라도
물 뿌려 사랑을 불태워준다
 
[해설]
유럽 여행을 다니다 보면 도시 한가운데 분수가 있는 곳이 많다. 유럽의 도시 구조는 대개 성당이나 중요한 건물을 중심으로 광장이 있고 사방으로 길이 뚫려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에는 거의 분수가 있는 셈이다. 아마 종교적 의미에서 정결례를 행하던 전통이 남아서 분수를 설치했을 것이다.
 
스토리텔링의 원조 로마 트레비 광장의 분수
로마의 트레비 분수. 트레비 분수는 왼쪽 어깨너머로 동전을 던지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져 관광객이면 누구나 동전을 던지며 운을 시험해본다. [중앙포토]

로마의 트레비 분수. 트레비 분수는 왼쪽 어깨너머로 동전을 던지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져 관광객이면 누구나 동전을 던지며 운을 시험해본다. [중앙포토]

 
분수 하면 로마의 분수가 유명하다. 트레비 분수는 왼쪽 어깨너머로 동전을 던지면 다시 로마를 방문할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져 관광객이면 누구나 동전을 던지며 운을 시험해본다. 세 개의 길이 만난다는 뜻인 ‘트레비’ 광장의 분수는 18세기 바로크 건축양식의 걸작이다. 스토리텔링의 원조다. 베드로 대성전 광장의 분수와 스페인 광장의 분수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명소다.
 
로마의 분수에서 샘솟는 물은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원류와 직접 연결돼 음용이 가능했다. 분수는 무더위에 지친 순례객들을 위로하고 쉬게 한다.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고 순화시키는 의미가 담겼다. 또 분수에는 만인 평등과 개방성의 의미가 담겼다.
 
성당 앞 광장에서 뿜어 나오는 분수의 물은 고관대작이나 병사, 평민이거나 이방인이나, 목마르거나 몸을 깨끗하게 씻는 데에 아무런 차별이 없었다. 그저 한 움큼의 물이면 충분했다. 광장은 많은 사람이 모여 소식을 전하고 의견을 나누는 여론창구 역할도 했다.
 
로마 제국이 번성한 데는 사방팔방으로 통하는 도로와 식수와 위생을 위해 건설한 수로 덕이 컸다. 세금만 내면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린 개방 사회가 되었으며, 천 년이 넘게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회적인 면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유전자가 섞이는 것이 더 건강한 개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폐쇄적인 사회와 인종은 오래가지 못했고 번영하지 못했다. 심지어 동물학자 최재천 교수는 ‘섞이면 더 순수하다’고 모순어법으로 설명한다.
 
분수는 사람들의 욕망과 꿈을 섞어 하늘로 뿜어 올린다. 단순히 물을 공급하는 곳이 아니라 인간에게 소통과 상상력과 창의력을 계발하는 장소가 되었다. 인간의 과학적 지식은 18세기 바로크 시대에 급격하게 발전했다. 그것은 광장과 분수와 같은 소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간의 창의력을 발달시키는 데는 두뇌의 활성이 요구된다.
 
두뇌의 활성화에는 충분한 기억 입력과 적절한 출력이 연결돼야 한다. 두뇌는 많은 네트워크 속에서 연결되는 점이 많을수록 활성화가 잘 된다. 인간의 기억은 어떤 사실을 단독으로 암기하는 것보다 그물처럼 얽혀 복합적으로 기억할 때 효율이 더 높다. 즉 시각·청각·촉각 등 오감과 그때 받은 느낌이나 감정이 동반될 때 오래 간다.
 
예를 들면 TV에서 중계방송으로 야구경기를 보는 것보다 직접 야구장에 가서 소리 지르며 응원하고, 동점이 되거나 역전 홈런을 때렸을 때, 처음 보는 사람과 얼싸안고 춤추었을 때 기억이 더 뚜렷이 남는다. 아마 매회 세세한 진행 상황과 흥분된 느낌이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을 ‘공간 기억’이라고 부른다.
 
지난해 프로야구 신한은행 마이카 KBO 한국시리즈 6차전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경기를 찾은 관중들이 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다. [뉴스1]

지난해 프로야구 신한은행 마이카 KBO 한국시리즈 6차전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경기를 찾은 관중들이 열띤 응원을 펼치고 있다. [뉴스1]

 
공간 기억의 특징은 사람을 따뜻하고 창의적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저녁노을이 지는 황홀한 바닷가에서 만난 연인과는 더욱 애틋한 감정을 진하게 느낀다. 그 이유는 인간의 기억이 두뇌작용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란다.
 
심지어 크리스티안 안코비치는 이런 현상을 보고 ‘사실 우리는 왼쪽 무릎으로 생각한다’라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그는 인간은 뇌로만 생각한다는 우리의 상식을 철저하게 무너뜨린다. 그런데 그의 설명이 백번 옳다. 인간이 단순히 두뇌로만 생각하고 창의력을 계발하는 것이 아니다.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하고 무료로 특허권을 세상에 내놓은 조너스 소크 박사를 기리기 위해 지은 기념 연구소 건물은 창의력을 위해 특별한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천정은 높아야 창의력이 왕성해진다며 건물을 높이 지었다. 물이 흐르는 인공 수로와 태평양의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을 만들었다. 연구원들을 좁은 공간과 책상에 가두어 놓지 않고 개방된 장소에서 자연의 경치를 감상하며 넉넉하게 소통할 공간을 마련했다.
 
유럽보다 400년 앞서 융성한 문물을 자랑하던 당과 송나라가 더 발전하지 못했던 이유도 공정한 법과 소통, 개방성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법은 사회적 시스템이다.
 
한의학에서는 예로부터 ‘구조가 기능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내려오고 있다. 예를 들면 오장육부가 감정을 지배한다고 처음부터 가르쳤다. 단순히 감정이 두뇌의 작용이 아니라 간심비폐신의 오장이 희노애락우공경의 일곱 가지 감정을 다스린다고 설명한다.
 
‘간담이 서늘하다’,‘담대하다’,‘심장이 떨어졌다’,‘허파에 바람 들었다’,‘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이런 표현이 모두 여기서 나왔다. 오장육부가 건강해야 적절한 슬픔, 분노, 우울, 기쁨, 즐거움을 느끼고 컨트롤 할 수 있다.
 
오장육부가 감정을 지배
한의학에서는 몸의 자세가 정신을 지배한다고 여겨 척추교정 치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앙포토]

한의학에서는 몸의 자세가 정신을 지배한다고 여겨 척추교정 치료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앙포토]

 
또 몸의 자세가 정신을 지배한다고 여겨 척추교정을 한의학의 치료에서 중요하게 취급한다. 실제로 최근에 거북목이나 일자 허리 환자가 늘어 척추교정을 받아야 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불면증이나 두통, 파킨슨 질환에도 바른 자세교정이 도움된다. 우울증 환자는 걸음걸이가 등을 숙이고 발을 끌며 걸어 누가 봐도 환자다. 그럴 때 운동을 하며 등을 펴고 걷는 것만으로도 우울증 예방과 치료에 도움이 된다.
 
남녀 사이 감정 메마르게 하는 고층건물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광장과 분수가 적다. 한국은행 앞 분수 정도가 눈에 띈다. 최근에 지은 고층건물 사이를 걸으면 여유 공간은 없고 썰렁한 골바람만 세차게 분다. 또 각 건물에는 출입구에 직원 전용 검색장치가 설치돼 완전히 교도소 같은 느낌만 든다. 도저히 젊은 청춘들이 새 사람을 만나 사랑을 느끼고 감정을 나눌 공간이 없다. 쉽게 눈 맞을 틈이 없다. 그러니 결혼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다행히 내가 사는 동네에는 성내천 음악 분수가 매일 뿜어 나온다. 날이 따뜻해지면 아이들이 물줄기를 맞으며 뛰어논다. 어른들은 물이 더러워 병에 걸린다고 말리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흔히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인 관계로만 안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내면 물이 불꽃을 더 치성하게 할 수도 있다. 자연의 상생상극의 원리는 겸허한 듯하나 엄밀하다.
 
윤경재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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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윤경재 윤경재 한의원 원장 필진

[윤경재의 나도 시인]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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